부모가 당신이 아픈 것을 알고 있나요?
30대 중반부터는 매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대학병원이란 곳들은 대체로 최대 2주일 이상의 입원이 불가했죠. 일을 열정적으로 하던 시절이라 입원을 해서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어려웠고요. 제 입원은 대개 불을 끄러 들어가는 응급처치 같은 연례행사였어요. 약을 한 알 바꾸는 것도 민감하게 몸의 부작용으로 쉽게 나타나는 바람에, 주로 입원을 통해 검사나 약물 테스트 등을 주기적으로 하던 시절이었어요.
입원이 잦아지고 익숙해지면서,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저는 병원이 편해지기 시작했어요. 매우 어색한 말이지만, 오히려 병원 밖에 있는 일상보다 병원에서 치료나 검사를 받는 시간에 몸이 더욱 편해지기 때문에, 저에게 입원 기간은 점차 편안해지고 또 의존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캐리어 가방을 끌고 혼자 입원하고 혼자 퇴원하는 것은 물론, 캐리어 안에 책, 카메라, 노트북처럼 나만의 입원을 최대한 편히 보내기 위한 장비들과 함께 입원하기 시작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덜 아팠던 건 분명 아닌데, 점점 매해 하는 입원에 익숙해지면서 입원 때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야간 근무를 하는 병원 내 의료진들을 사진 찍거나(퇴원 후 모두 선물로 전달했어요), 매일 노트북을 켜고 밀린 일을 해내거나, 밀린 책을 읽는 식으로. 나만의 입원 후 시간은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한 환자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죠.

AI art – 병원 입원을 안식처라 생각하던 시절
물론 철딱서니 없는 워커홀릭의 모습에 같은 병실을 쓰는 어른들과 주치의 선생님들께 혼도 많이 났어요. 병원에 올 지경까지 일을 하고 몸을 망가뜨려 놓고, 여기 와서도 또 일을 하고 직원들이 병원까지 일을 들고 찾아오게 한다고 꾸중을 듣곤 했죠.
하지만 어떻게, 정신이 말똥한 시간에 천장만 보고 누워 있을 수 있겠어요? 일 년에 2주를, 30대의 저를 제외하곤 모두가 할머니들인 6인실 한가운데에서, 그게 쉬운 하루하루였을까요? 지금 다시 입원하라고 해도 저는 똑같이 당당하게 캐리어를 끌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해 갈 거예요. 플라스틱 물병에 빨대, 물수건, 슬리퍼 같은 입원 기본 물품보다, 병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저에겐 나다움을 잃지 않는 행위나 물건들이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입원했을 때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요. 특히 나보다 마흔 살은 더 많은 어른들 속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온갖 음식들과 관심이 쏟아지곤 했어요. 1인실보다 6인실에 입원하라고 하는 이유를 저는 경험으로 공감해요. 2인실은 둘뿐이라 서로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어야 해서 더 조심스럽고 예민해지고, 1인실은 처음엔 좋지만 계속 혼자인 저에겐 매우 쓸쓸한 공간이었어요. 적당히 활동이 가능하신 분들로 모아진 6인실은 말 그대로 온갖 어른들의 역경과 인생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쉬려면 타이밍 맞춰 모두가 같이 잠들어야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요. 저는 6인실 중앙, 창도 벽도 없는 자리에 커튼을 사방에 치고 섬처럼 누워서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어른들의 삶과 아픈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많이 키득댔던 기억이 있어요.
병실의 아침은 매우 일찍 시작되고 일찍 마감되죠. 아침 일찍(5시경) 하는 혈압, 피검사와 소독 냄새가 나는 대걸레를 들고 조용히 바닥을 치우고 가시는 미화원 선생님에 의해 모두가 함께 기상하죠. 7시경부터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식사와 투약, 그리고 아침 주치의의 회진을 기다리며 환자들은 대기 모드로 들어가죠. 저녁엔 더 일찍 마감돼요. 저녁 6시경 먹는 밥과 다 같이 동시에 먹는 저녁 투약이 끝나면 빠르면 8시, 늦으면 9시엔 잠이 들게 되어 있죠. 물론 밤새 아프신 분들, 검사하시는 분들로 인해 잠을 뒤척이게 될 때도 많지만, 다인실 커튼 안에서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하루가, 이틀이, 그렇게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가죠.
혼자 입퇴원이 익숙해질 무렵, 어느 분께서 저의 침대로 오셔서 이야기하셨어요.
“가족이 없어?”
“아니에요. 언니랑 동생이 주말에 왔었어요.”
“아니, 부모가 없어?”
“아, 아니에요.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이야기를 못 했어요.”
“그러는 거 아니야. 자식이 아플 땐 부모가 같이 아파야 하는 몫이 있어. 엄마에게 빨리 전화해서 아프다고 이야기해. 그럼 더 빨리 나을 거야. 젊은 사람이 참 혼자 안됐네.”
그렇게 병원을 가거나, 혼자 앰뷸런스를 타면서 “혼자세요? 혼자 사세요? 위험한데…” 같은 말은 들어봤어도, [부모의 몫]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어요. 매번 씩씩한 척했던 제가 ‘나 혼자 아파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한 말이었죠.
그 후로 어땠냐고요? 물론 한동안 부모님께 계속 말하진 못했어요. 내가 왜 아픈지, 내가 왜 입원해야 하는지조차 뚜렷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요. 여전히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걱정을 덜 전하고 싶어서였는지, 그게 아니면 혼자 씩씩하고 센 척하기 위해서였는지, 지금도 그때의 감정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 제 전신의 혈관이 모두 일을 멈추고 심각한 수술대 앞으로 향하기 직전, 저는 엄마에게 알렸어요.
“엄마, 같이 있어줄 수 있어?”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오셨고, 제가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음식들을 챙기시며 밤새 통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저를 곁에서 지키셨죠.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병원 투어와 시술, 수술들을 엄마 손을 잡고 함께했죠. 엄마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제가 사라질까 너무 두려웠다고 이야기하세요. 아마도 저보다 더 간절했던 엄마의 기도와 보살핌으로 제가 건강을 많이 회복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거라 생각해요.
선글라스를 끼고 캐리어를 끌며 혼자 입퇴원을 하던 30대의 저는 사라졌어요. [부모의 몫]은 부모가 아파해야 하는 몫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다시 보호받아야 하는 몫이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엄마를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죠? 이젠 제가, 엄마가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딸이 되어야겠죠. 하지만 엄마도 과연 자식에게 아프다고 연락을 하실까요?
“딸, 아픈데 와 줄 수 있어?” 그런일은 더더욱 쉽지 않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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