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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두·렌틸콩·두부별 콜레스테롤 관리 포인트

    대두·렌틸콩·두부별 콜레스테롤 관리 포인트

    💡핵심 포인트
    • 대두와 렌틸콩 등 다양한 콩류는 식이섬유가 풍부해 혈중 콜레스테롤 배출을 돕습니다.
    • 하루에 약 100g에서 130g의 콩류를 꾸준히 섭취하면 LDL 콜레스테롤이 감소합니다.
    • 콩자반이나 튀긴 두부처럼 당과 지방이 많은 가공식품은 피하고 삶거나 쪄서 먹어야 합니다.

    안녕하세요, 메디쏠라 연구소입니다 🙂
    건강검진에서 혈중 지질 수치를 확인한 뒤 식단을 다시 짚어 보는 분들이 많은데요. 특히 동물성 지방을 줄이면서, 콩류와 콜레스테롤의 관계를 궁금해하시는 분이 많아요. 오늘은 콩류가 콜레스테롤 관리에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콩 종류별로 일상에서 활용하는 방법까지 차근차근 살펴볼게요!

    대두 단백질의 근거가 많은 이유 🌿

    식단에서 육류를 줄이고 식물성 단백질로 대체하려 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식재료는 대두입니다. 대두 단백질에 관한 연구는 다른 콩류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축적되어 있습니다. 콩류 섭취에 관한 임상시험들을 종합한 2025년 발표 메타분석이 제시되기도 했는데요. 여러 임상시험을 종합한 메타분석에서는 대두 단백질을 꾸준히 먹었을 때 LDL 콜레스테롤이 약 3~4% 낮아졌어요.

    • 식물성 단백질 — 포화지방이 많은 고기 대신 콩을 먹으면, 그만큼 포화지방 섭취가 자연스럽게 줄어요.
    • 수용성 식이섬유 — 콩의 수용성 식이섬유는 장에서 담즙산과 결합해 몸 밖으로 내보내는 것을 도와요. 그러면 간은 부족해진 담즙산을 다시 만들기 위해 혈액 속 콜레스테롤을 끌어다 쓰게 되죠. 

    물론 특정 식품 하나가 콜레스테롤 수치를 크게 떨어뜨리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포화지방이 많은 동물성 식품 대신 콩을 꾸준히 활용하면, 식사 전체의 균형을 맞추는 데 도움이 돼요. 미국심장협회(AHA)도 고기 대신 콩류 같은 식물성 단백질을 자주 먹도록 권하고 있어요.

    두부와 무가당 두유 활용법 🥛

    일상에서 대두를 가장 쉽고 편하게 섭취할 수 있는 형태는 바로 두부와 무가당 두유입니다. 매끼 올라가던 고기반찬 위주의 식단을 두부구이나 두부 샐러드로 바꾸면 자연스럽게 포화지방 섭취량을 줄일 수 있습니다. 두유를 선택할 때는 성분표를 꼼꼼히 확인하여 당분이 첨가되지 않은 무가당 제품을 고르는 것이 핵심입니다. 당류 섭취가 늘어나면 오히려 대사 균형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 식사 대용으로 무가당 두유를 마시거나, 점심 식사에 찌거나 구운 두부를 곁들이는 방식은 실천하기 쉬운 훌륭한 기준이 됩니다. 단순히 두부를 무작정 많이 먹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기존 식단에서 기름진 육류가 차지하던 자리를 두부로 채워 넣는다는 생각으로 접근해 보세요. 이렇게 식재료를 치환하는 습관은 장기적으로 무리 없이 식단을 유지하는 비결이 됩니다.

    TIP

    두부와 두유 식단 활용 팁

    • 아침 식사: 무가당 두유 1잔과 통곡물 빵 곁들이기
    • 점심/저녁: 기름진 고기 대신 찌거나 구운 두부 반찬 활용하기
    • 간식: 단맛이 없는 순두부나 연두부를 가볍게 떠먹기

    렌틸콩과 병아리콩의 장점 🍲

    대두 외에도 렌틸콩과 병아리콩은 식단을 다채롭게 만들어 주는 좋은 식재료예요. 수용성 식이섬유와 식물성 단백질을 고루 갖추고 있어, 식사 후 든든함을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돼요. 대두를 제외한 콩류(강낭콩, 병아리콩, 렌틸콩, 완두콩 등)를 다룬 26개 임상시험을 종합한 메타분석에서는, 콩류를 하루 약 130g 먹었을 때 콩류를 먹지 않은 식단보다 LDL 콜레스테롤이 약 5% 낮아졌다는 결과가 있습니다.

    렌틸콩은 껍질이 얇아 따로 불릴 필요 없이 조리 시간이 짧고, 부드러운 식감 덕분에 수프나 카레에 활용하기 좋습니다. 병아리콩은 푹 삶아서 샐러드 토핑으로 얹거나, 곱게 으깨어 스프레드 형태로 빵에 발라 먹는 방식으로 즐길 수 있습니다. 밥을 지을 때 백미의 비중을 조금 줄이고 렌틸콩이나 병아리콩을 섞으면 자연스럽게 식이섬유 섭취량을 늘릴 수 있습니다.

    콩의 종류 주요 특징 추천 활용법
    렌틸콩 껍질이 얇고 조리가 빠름 카레, 수프, 샐러드 곁들임
    병아리콩 고소한 맛과 단단한 식감 샐러드 토핑, 후무스(스프레드)

    검은콩과 완두콩 고르는 법 🛒

    다양한 콩류를 꾸준히 섭취하려면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검은콩이나 완두콩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하루에 약 1/2컵(약 100g~130g)의 콩류를 꾸준히 섭취할 경우 LDL 콜레스테롤 수치가 유의미하게 감소한다고 설명한 자료도 있습니다. 완두콩은 특유의 기분 좋은 단맛이 있어 볶음밥이나 파스타에 넣으면 요리의 풍미를 한층 살려줍니다.

    검은콩은 밥에 섞어 먹거나 가볍게 삶아서 출출할 때 간식으로 섭취하기에 알맞습니다. 콩을 고를 때는 표면이 매끄럽고 윤기가 나며 흠집이나 상처가 없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 가지 콩만 대량으로 섭취하는 것보다는 여러 가지 콩류를 식단에 지속적으로 포함하여 다채로운 영양소를 공급받는 것이 안정적인 식사 구조를 만드는 데 훨씬 유리합니다.

    📊콩류 섭취 관련 연구 수치
    • 대두 외 콩류 연구: 대두를 제외한 콩류는 LDL 콜레스테롤을 약 3.5 mg/dL 낮췄음
    • 적정 섭취량 제안: 하루에 약 1/2컵(약 100g~130g)의 콩류 꾸준한 섭취 시 유의미한 감소
      ※ 출처: 대두 단백질 — Blanco Mejia 외(2019), Journal of Nutrition / 대두 외 콩류 — Ha 외(2014), CMAJ.

    콩자반·유부·튀긴 두부의 주의점 ⚠️

    콩류가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콩 가공식품이 무조건 권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콩자반, 유부, 튀긴 두부는 조리 과정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해요. 콩자반을 만들 때 설탕과 물엿, 간장을 다량 사용하면 당과 나트륨 섭취가 급격하게 늘어납니다. 유부나 튀긴 두부는 기름에 튀기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지방 함량이 매우 높아집니다.

    이러한 가공식품을 자주 섭취하는 것은 오히려 식사 구조의 균형을 무너뜨릴 수 있는 요인이 됩니다. 콩의 장점을 온전히 얻으려면 가당이나 고염, 튀김 형태의 조리법은 가급적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삶거나 찌는 방식, 혹은 소량의 식물성 기름만 사용하여 가볍게 굽는 조리법을 선택해 보세요. 콩 본연의 담백한 맛을 즐기면서 불필요한 첨가물 섭취를 줄이는 것이 핵심입니다.

    가공식품 종류 주의해야 할 성분 대체 조리 및 섭취 방법
    콩자반 높은 당류 및 나트륨 간을 약하게 하고 소량만 섭취
    튀긴 두부·유부 높은 포화지방 및 칼로리 생두부, 찐 두부, 구운 두부로 대체

    복부 팽만이 있을 때 먹는 방법 🍽️

    평소 콩을 잘 먹지 않다가 갑자기 양을 늘리면, 풍부한 식이섬유로 인해 복부 팽만감이나 가스 차는 느낌 등 소화 불편을 겪을 수 있습니다. 콩에 들어 있는 식이섬유와 일부 당 성분이 장에서 발효되기 때문이에요. 이를 줄이려면 조리 전에 콩을 물에 충분히 불리고, 속까지 완전히 부드러워질 때까지 푹 익혀서 섭취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무리하게 양을 늘리지 말고, 하루 한두 숟가락 정도의 소량부터 시작하여 장이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식사 후 불편함이 계속된다면 껍질이 얇아 소화가 비교적 수월한 렌틸콩을 선택하거나, 껍질을 벗긴 콩을 활용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무리해서 억지로 먹기보다는 자신의 소화 능력에 맞게 조절해 보세요. 건강한 식사는 특별한 음식을 찾는 일이 아니라,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한 끼 구조를 반복 가능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콜레스테롤 #식물성단백질 
    이 콘텐츠에는 생성형 AI가 활용되었습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
    콩류가 콜레스테롤 관리에 어떻게 도움을 주나요?

    A.
    콩류에 풍부한 식이섬유가 장내에서 담즙산의 재흡수를 줄이고 배출을 돕습니다. 간이 담즙산을 보충하기 위해 혈중 콜레스테롤을 사용하게 되면서 관리에 기여하는 원리입니다.

    Q.
    두유를 마실 때 주의할 점이 있나요?

    A.
    당분이 첨가된 두유는 대사 균형에 부담을 줄 수 있으므로, 성분표를 확인하여 당류가 들어가지 않은 무가당 두유를 선택하는 것이 좋습니다.

    Q.
    렌틸콩과 병아리콩은 어떻게 먹는 것이 좋나요?

    A.
    렌틸콩은 조리 시간이 짧아 수프나 카레에 넣기 좋고, 병아리콩은 푹 삶아 샐러드 토핑으로 얹거나 으깨서 빵에 발라 먹는 스프레드 형태로 활용하기 좋습니다.

    Q.
    콩자반이나 유부는 마음껏 먹어도 되나요?

    A.
    콩자반은 설탕과 간장이 많이 들어가 당과 나트륨 섭취가 늘어날 수 있고, 유부는 기름에 튀겨 지방 함량이 높습니다. 섭취량을 줄이고 가급적 찌거나 굽는 조리법을 권장합니다.

    Q.
    콩을 먹고 배가 더부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식이섬유로 인해 소화가 불편할 수 있습니다. 조리 전 콩을 충분히 불리고 완전히 푹 익혀서 하루 한두 숟가락의 소량부터 시작하여 장이 적응할 시간을 주는 것이 좋습니다.

  • 여행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

    여행의 가장 중요한 준비물

    D-2주 부터 시작하는 비상약준비

    추석을 맞아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푹 쉬고 싶었지만, 저는 이번에도 출장길에 올랐어요. 지금 저는 미국 뉴욕주에 와 있습니다.

    적게는 1년에 3~4번, 많게는 10번까지. 비행기를 타는 일은 어느새 제 삶의 일부가 되었어요.

    제 여행은 20대 초반, 전 세계의 좋아하는 공간을 직접 다 보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되었어요. 건축 유학을 떠나는 비용과 평생 여행하며 건축물을 보러 다니는 비용을 대략 계산해 보니, 복리까진 따져보진 못했지만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본격적인 여행은 대학원 시절부터였어요. 한 달만 다녀오겠다던 유럽 건축 기행은 두 달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겨우 돌아와 수업을 듣곤 했죠. 여행을 일상으로 만드는 계획은 아주 단순했어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다가 어느 정도 여행 자금이 모이면 그냥 떠나는 거예요. 유학 비용을 스스로 1/n로 나눠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뒤로, 저는 여행을 제 인생에서 가장 긴 프로젝트이자 가장 긴 투자로 정하고 두려움 없이 실행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매년 유럽에 가기도 하고, 가까운 아시아 나라들은 겁도 없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20대에는 2년 동안 호주에 머물며 끝없는 로드트립을 했죠. 이 모든 것이 건축을 위한 경험이라 여기며, 저는 점점 한국에서 몰입해 사는 삶과 무언가를 찾고 채우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삶을 구분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나라에서 로드트립을 했고, 한 달 넘게 기차에서만 잠을 잔 적도 있어요. 한 도시에 푹 빠져 계획에도 없이 프라하에 한 달간 머물기도 했죠. 참 용감하고도 무모했던 인생 계획은 해마다 설렘과 함께 차곡차곡 이어졌어요. 그리고 건축 일을 하며 다닌 여러 답사와 협업 출장을 통해 현지 문화에 더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제 식사는 무척 제한적이었어요. 그 멋진 곳에서 다양한 문화의 음식을 맛볼 기회를 모두 저버리고, 식빵과 잼, 약간의 과일이나 요거트가 20대 여행 음식의 전부였죠. 스스로 번 돈으로 빠듯하게 모험하던 저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여행지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기 위해 가장 많이 아낀 것이 바로 식비였거든요. 맥주 한 캔은 마셔도, 맛있는 현지 음식을 즐기는 여유를 갖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30대 중후반, 식품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커리어가 바뀌면서 음식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 돌아보면 건강에 경고등이 켜지면서 의식적으로 음식을 더 챙겨 먹으려 했던 시기와도 겹치네요.

    20대 중반에는 1년에 최소 34회, 30대 초중반 이후에는 1년에 7-10회 정도(출장 2~3회, 나머지는 개인 여행)를 떠나게 되면서 제 여행 가방 속 물건들의 비율외 중요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시작은 첫 일본 여행에서 겪은 아나필락시스였어요. 바르셀로나 직항이 없던 시절에는 도착해 보니 수하물이 오지 않았던 일도 있었죠. 다음날 아침 먹을 약이 없었던 거죠. 그 뒤로는 부치는 짐과 기내 짐 양쪽에 비상약을 두 배로 챙기기 시작했어요.

    밀라노 디자인위크에 참가했을 때도 잊을 수 없어요. 혈관 상태가 악화되기 전쯔음, 하루 2만 보(약 10km) 넘게 걸어야 하는 전시관들을 3일 동안 돌아보다가 발바닥 혈관이 터져 걷지도 못하고 밀라노에 누워 있었어요.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걸을 수조차 없게 되자, 결국 비행기표를 바꿔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공황장애 약의 부작용으로 일주일치 숙박비를 포기하고 급히 귀국한 적도 있어요. 그뿐일까요. 방콕에서는 심한 고열에 시달려 5일 내내 숙소에 누워 똠얌꿍 국물과 약만 먹다 돌아온 기억도 있어요. 2년 전 런던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가방 안에 비상 항생제 한 알이 없었다면 저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을 거예요.

    생각해 보니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Emergency”라고 말하고, 스스로 표를 바꿔 집으로 겨우 돌아온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네요. 돌이켜보면 무모하고 위험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그게 저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어요.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며 살겠다는 인생의 목표는 20대 초반의 그때와 지금도 똑같거든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제 가방은 점점 커지고 있어요. 여행 때마다 챙겨야 하는 비상약 때문이에요.

    Img- 이번 출장길의 제 상비약, 비상약들의 모습

    중요한 장거리 출장이라면 저는 2주 전부터 가방을 준비해요. 병원에서 처방받아야 하는 약들이 있기 때문이죠. 꼭 필요한 약이 빠져 있다면 미리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 둬요. 매일 먹는 약부터 항생제, 스테로이드, 항히스타민제까지 모두 의료진에게 처방받은 약으로 준비해야 해요. 이제는 나이와 경험 덕분에 제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되어, 준비해 간 약으로 필요할 때 스스로 조절하고 있어요.

    게다가 저는 이부프로펜 계열 약에도 심한 부작용이 있어서, 사소한 감기약부터 극심한 변비에 대비한 식이섬유제까지 세심하게 챙겨야 해요. 옷가방보다 약가방이 더 작을 때도 있어요. 아이러니하죠?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심란하지만, 이건 제가 여행하는 방법이에요. 현지에서 제 증상과 약물 민감성을 모두 설명하면 어떤 의사도 선뜻 처방하지 못하거든요. 다들 빨리 큰 병원에 가라고 하지만, 지금 있는 뉴욕만 해도 한국까지 16시간을 날아가야 하죠. 어찌 보면 저 자신을 돌보는 가장 작은 방법이지만, 이제 비상약 가방은 제 여행 가방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이제 16시간을 날아가면 한국에 도착하겠네요. 집에 가면 가장 먼저 비상약 가방을 꺼내 제자리에 둘 거예요. 그리고 다음 달 또 다른 출장을 위해 약의 유효기간과 이번에 쓴 약들을 확인하고 다시 채워 두겠죠. 조금 번거롭고 귀찮지만, 이것이 스스로와 타협하며 인생의 목표를 채워 가는 저만의 가장 성실한 방법이에요.

    그리고 비상약 가방을 볼 때마다 늘 생각해요.

    “언젠가 이 가방 속 약들에서 해방되는 날이 오겠지?”

    Tip. 저는 시차 적응을 위해 별도의 수면보조제를 먹지 않아요. 최대한 현지 시간에 맞춰 잠들려고 노력하죠. 출장 중에는 처방받은 무기력 개선제(스티몰)로 몇일의 아침은 체력을 챙겨요. 홍삼처럼 면역계를 자극하는 건강기능식품은 따로 먹지 않아요. 밤에는 최대한 일찍 잠들고 비타민이 풍부한 현지 과일을 챙겨 먹는 것. 이것이 여행지에서 피로를 빨리 풀고 현지 시간에 적응하는 저만의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한국에서는 잘안되지만 오히려 여행지에서 더 철저한 방법이죠 🙂

  • 오늘 하루 무엇을 드셨나요?

    오늘 하루 무엇을 드셨나요?

    식사 기록, 나는 무엇을 먹고 살아왔나

    2018년 김형미 소장님(현 메디쏠라 연구소장, 전 세브란스병원 임상영양팀장)을 병원에서 소개받았어요.

    수많은 검사를 통해 오래 진행된 영양실조 상태와 섭취에 대한 다양한 민감성(음식 및 약물 등 두드러기나 아나필락시스 같은 단순 알레르기성 반응을 넘어, 입에 음식물을 넣는 순간 나오는 즉시적 염증 반응 등)이 최고조로 달했을 시점이었죠.

    음식을 먹는 게 가장 두려웠던 그 시기가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음식을 잘 먹어야 하는 극심한 영양실조 상태와 같았어요.

    병원의 링거로 영양을 보충하고 대다수의 불편한 음식을 제외하다 보니, 점차 저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적어지고 있었죠.

    소장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 극심함이 극에 달해, 흰쌀밥 혹은 엄마가 해주시는 팥을 넣은 찰밥에 흰살생선 또는 김 정도를 제외하고는 고춧가루가 많은 김치조차 물에 헹궈 먹는 상태까지 몸이 점점 더 민감해져 갔어요. 먹는 양도 하루에 밥 한 공기를 겨우 채울 정도였어요.

    “일단, 식사를 기록해 봅시다. 지금 본인에게 필요한 건 양을 점차 늘려나가는 게 우선이에요. 음식을 가리는 것보다 양을 늘려 기본적으로 몸에 필요한 만큼은 충족해줘야 합니다. 일단 어떻게 먹는지 좀 봅시다.”

    소장님은 나와의 첫 번째 만남에서 비빔밥을 사주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일단 그 비빔밥을 다 먹는 걸 목표로 해봐요. 고추장은 자극적일 수 있으니 빼내고 담백하게 비벼서라도 최대한 먹어봐요”

    소장님이 지켜보시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서 밥 반 공기 정도의 양을 먹었어요.

    “앞으로도 본인이 먹을 수 있는 양에서 한 숟가락만 더 먹는 것을 목표로 해보세요. 그리고 무엇을 먹었는지, 컨디션이 어떤지, 약은 무엇을 먹었는지 한번 기록해 보세요. 조금씩 늘려가면서 정상 범위까지 천천히 가는 게 첫 번째 숙제예요”

    img- 소장님께서 처음 권유하셨던 식단일기 (ai 생성 이미지)

    전 이 숙제가 참 어려웠어요. 영양실조라는 개념이 저와 같이 저체중에 몸속에 필요한 영양소가 손실된 상태도 있지만, 현재의 영양 불균형 — 비만 상태에서 특정 영양소가 부족하거나 넘치는 것도 소장님께서는 영양실조라 말씀하셨어요.

    몸은 필요한 만큼의 에너지와 영양소가 있고, 이 영양소들을 잘 섭취해야만 뇌가, 몸이 각각의 쓰임에 에너지를 생성한다는 원리를 설명해 주셨죠.

    한국의 어른들이 말하는 “제철의 식재료를 골고루 잘 먹는다”는 한식의 개념이 사실 압축된 섭취에 대한 표현이라면, 소장님은 제 몸의 영양 결과값을 기반으로 진짜 모든 게 부족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전체적인 섭취 방법을 다시 제안해 주셨죠.

    사실 엄마의 완벽한 식단을 먹고 자라던 스무 살 이전의 삶에서는 부족함이 없었어요.

    여덟 살 무렵 자발적으로 육류를 배제한 베지테리언이 되었을 때도, 엄마는 부족한 단백질을 생선이나 콩류로 채워주시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어요. 제가 지닌 여러 알레르기와 아토피 때문에 항상 유기농 야채를 따로 주문해 요리하셨고, 우유와 과일 등으로 부족하기 쉬운 다른 영양 섭취도 정말 제철에 따라 골고루 할 수 있게 해주셨죠. 엄마는 저와 가족을 위해 자연주의 요리를 따로 배우시기도 할 정도로, 제철에 맞는 다양한 한식을 가족들에게 해주셨어요.

    봄에는 쑥, 두릅, 주꾸미를 시작으로, 여름에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들깨 머위대 건새우탕, 갑오징어부터 고구마순김치, 오이김치, 그리고 가을의 전어, 새우, 가을만의 무김치, 겨울에는 벚굴(작은 돌에 붙어 있는 굴) 및 생태 지리탕, 생갈치를 넣어 만드는 김치까지 — 엄마만의 전라도식 요리법을 통한 사시사철 식재료로, 엄마는 제 영양뿐 아니라 가족 모두의 건강을 책임지셨죠.

    소장님을 만난 30대 중반까지 약 15년 이상의 시간을 저는 소홀히 살았죠.

    유독 좋아하던 땅콩(오메가6가 더 높은) 잼, 땅콩이 가득 박힌 초코바, 그리고 야채만 들어간 김밥(김밥을 사서 햄, 맛살을 빼내는), 참치 삼각김밥, 간단히 먹는 잼 바른 빵, 그리고 술 정도가 제가 20대에 즐겨 먹은 음식들의 전부였어요. 저는 먹는 것보다 그 시절 여행을 하거나 건축을 하는 게 더 흥미로웠죠. 제 뇌는 먹는다는 즐거움, 아니 엄마가 차려 주신 정성스러운 제철 음식들을 잊은 채, 먹는 즐거움을 모두 버리고 새로운 유희에 온통 빠져 살게 되었죠.

    소장님을 만나고 저는 18년에 식단일기를 기록했어요. 가장 건강이 빠른속도로 안좋아지기 시작한 시기였죠. 그런 이유로 식단일기는 1년이 채 안 돼서 중단되었어요. 19년 말, 건강에 더 큰 변화가 오면서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기 때문이에요. 식단을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은, 수술한 이후 가장 후회하는 부분이에요. 제가 20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저는 딱 하나, 엄마가 10대 때 알려주셨던 건강한 식습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지 않았을 거예요.

    img – 2018년 직접 기록한 식단일기 모습. 10월 스페인 여행 앞 뒤의 기록을 통해 스페인에서의 음식들이 나에게 어떠한 경험을 주었는지 기록되었다. 식사의 양보다는 음식의 종류 (민감성중심) 그리고 섭취약(약물도 대다시 섭취가 불가하던 시기, 최소한의 보조제) 및 운동량, 배변기록까지. 식단일기를 통해 무엇을 먹고 내가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를 매일 기록해갔다. 스페인에 다녀온 후 경험한 변화기록을 가장 먼저 김형미 소장님께 전하였다. 그렇게 메디쏠라가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

    2018년 10월, 추석 다음 날 스페인으로 향한 제가 그곳에서 먹은 음식, 약, 컨디션에 대한 기록을 하면서 음식이 변화시키는 기적을 저는 경험하게 되었죠. 그 기록은 고스란히 스페인과 한국에서의 음식 섭취 후 변화를 담게 되었고, 그것이 메디쏠라의 매우 중요한 시작 동기가 되었어요.지중해에서 느낀 음식 경험을 통한 변화를 어떻게 하면 한국인들에게 맞는 기준으로 제안할 수 있을까. 그 연구가 의료진, 그리고 저에게 식단일기를 알려주신 김형미 소장님과 함께 시작하게 된 것이죠.

    실제 저는 몸의 자극을 중심으로 기록했기 때문에 섭취량을 기록하진 않았어요. 우선 ‘최선을 다해서 먹는다’만 목표였고 음식 섭취로 인한 몸의 자극, 변화를 주로 관찰하는게 주 목적이었어요.

    나중에 메디쏠라를 하면서 소장님을 통한 영양 교육을 통해 알게된 원리를 알게되었죠. 스페인의 음식은 오메가 3 및 오메가 9이 높은 음식 그리고 부족했던 단백질 섭취도 꾸준히 한 반면, 하나의 메뉴가 메인이거나 반찬의 다양성으로 선택이 가능한 한식을 먹는 패턴에서는 제가 피해야하는 음식 (오메가 6나 염증유발)은 즐기고 반대로 단백질과 좋은 지방 (오메가3, 9등)의 섭취가 극도로 부족했었다는 결과를 알 수 있었죠. 그래서 메디쏠라의 상품 기준을 세울때, 소장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강조하셨던 부분! 저와같이 영양 불균형 (부족하던 넘치던)을 뛰어 넘어 편식이 불가능하고 섭취시 꼭 필요한 좋은 영양 밸런스를 최적으로 맞춰 한그릇에 담는 one plate meal로 기초를 설계하셨어요. 부족하지도 넘치치도 않지만 모르고 먹어도 기본은 충족될 수 있게 만드신거죠.


    최근에 읽은 마이클 이스터(Michael Easter)의 『편안함의 습격』(The Comfort Crisis)이라는 책에도 같은 경험과 중요성이 나오더군요.

    233p / 가장 중요한 것은 데이터 수집이었다. 캐시는 각 개인을 추적하면서 아래와 같은 사항들을 기록했다.

    • 음식 섭취량과 음식의 종류

    • 일상적인 하루 루틴

    • 수면 스케줄

    • 스트레스 및 에너지 수준

    • 일일 체중

    • 운동과 걸음 수

    “단순히 자신의 행동을 더 잘 자각하게 돕는 것만으로도 수백 가지 문제가 단번에 ‘해결’됐습니다” —(문장 건너뛰기)— “이 작업은 호손 효과(Hawthorne Effect)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겁니다” 호손 효과는 1958년 발견된 행동심리 현상으로, 사람은 자신이 관찰받고 있다는 것을 알면 행동을 바꾼다는 개념이다.


    저는 2026년 9월, 8년 전 저의 식단일기를 꺼내 보며 내가 어떠한 과정을 겪었고 왜 메디쏠라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자각하게 되었어요.

    식단을 기록했다고 해서 그 섭취가 옳바른건 아닐 수 있어요. 자신에게 맞는 칼로리와 영양은 각자 다르기 때문이죠. 이제는 많은 건강기록 앱을 통해 식단과 운동량 등을 기록할 수 있지만, 실제 ‘자각’이라는 걸 경험하는 게 앱만으로는 어렵다는 생각도 들어요. why와 how가 존재하지 않는 곳들이 많고, 부족한 영역에서 쉽게 섭취 가능한 마이크로한 보조제 정도의 솔루션들은 이제 다수 존재하죠.

    하지만 스스로 자각하고, 마이크로뿐 아니라 삶 전체의 밸런스와 매크로한 영양 섭취를 함께 제안한다면 — 저와 같이 소장님을 만나는 행운이 없었더라도 — 건강을 자각하는 데 더 많은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물론 메디쏠라가 모두에게 그런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마음과 함께.

    오늘 하루 나에게 맞게 옳바르게 먹었는지, 생각해 보신 적 있으신가요? 식단일기 – 나의 컨디션 일기를 한번 기록해보세요.

  • [30대]공황장애(panic disorder) 대 탈출기

    [30대]공황장애(panic disorder) 대 탈출기

    공항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공황장애라뇨.

    퇴근길이었어요. 서울의 퇴근길 지하철은 지옥철이라고 불렸지만 왜 그렇게 불리는지 크게 관여치 않았어요. 모든 게 저에게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날도 퇴근길이었어요. 3호선(주황색) 전철을 타고 매봉에서 충무로까지 이동한 후 다시 4호선(파란색)으로 갈아타고 한성대입구까지 가는 약 45분 정도의 지하철 출퇴근을 하던 시절이었어요. 저에겐 함께 출퇴근을 하던 동료가 있었어요. 그날도 여느 때처럼 퇴근 후 만원 지하철을 타고 한강을 건너고 있었어요. 한강을 건너서 어느 순간부터 기억을 잃더니, 제 귓속으로 다시 지하철의 소음과 동료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한 건 약 세 정거장쯤 정신을 잃고 지나서부터였어요.

    “언니, 괜찮으세요?” 동료가 저를 부축했을 때, 이미 제 얼굴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되고 식은땀까지 흘린 뒤였어요. 그렇게 급히 열리는 문으로 뛰쳐나가 막혀 있던 숨을 몰아쉬며 한참을 울었던 게 시작이었어요.

    그 시절 저는 허리 디스크 수술을 하고 아직 회복되지 않은 몸으로 최선을 다해 회사를 오가고 있었어요. 그리고 서울의 가장 권위 있는 S대학교 병원 류마티스내과에서 섬유근육통 관련 진단과 약을 처방받던 때였어요. 저는 이 증상을 S대학교 의료진에게 이야기했고, 곧바로 신경정신과의 명의를 만날 수 있었어요. 아직도 그날 처음 대학병원 신경정신과에 가던 제 모습과 그때의 공기가 잊히지 않아요.

    ‘내가 왜 이곳에 가고 있을까?’ ‘내가 신경정신과에 올 정도로 뭐가 잘못된 걸까?’ 하지만 전문의를 만나고 나서, 저는 분명 공황장애의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어요. 오랜 통증과 질병 때문에 종종 검사했던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도 항상 ‘이상 없음’으로 통과하던 제가, 폐쇄된 비행기를 타고 해외를 드나들며 사람들 속에서 지내기를 좋아했던 제가, 시끄러운 콘서트장 스피커 앞도 좋아했던 제가, 어떻게 공황장애란 말인가요?

    “선생님, 저는 공항도 좋아하고 콘서트도 정말 즐기는 편인데 어떻게 공황장애인 거죠?” 전문의는 저의 어이없는 말장난에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더니 대답하셨어요.

    “터널 중간에 갇힌 것뿐입니다. 본인이 터널 끝을 발견하면 나오면 되는 거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말은 참 쉬웠어요.

    그리고 저는 이미 터널 밖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아니, 저는 터널에 갇힌 적도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왜 제 신경계가 저를 이런 곤란에 빠뜨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제 귀는 소리에 점점 더 민감해졌고, 사람과의 밀도가 올라가면 숨을 쉬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증상은 대부분 비슷하게 찾아왔어요. 일단 밀폐되고 밀도가 높은데 소음까지 지속되는 공간. 제가 그렇게 좋아하던 공간 속에서 저는 어느 순간 눈물이 흐르고, 소리가 멀어지고, 호흡이 불안정해졌어요. 다행히 눈물과 소리가 먼저 찾아왔기에, 이 증상이 나타날 때면 늘 신데렐라처럼 그 공간을 뛰쳐나가 최대한 조용한 곳으로 가 혼자 울곤 했어요.

    그림 ; 공항장애 때 내가 느끼던 기분. 나를 둘러싸고 있는 불편감

    그리고 공황장애를 겪으며 가장 힘들었던 건 역시 약물 테스트였어요. 그 당시 저는 몸 상태가 워낙 예민해서 약물에 대한 과민반응이 심했어요. 그중에서도 공황장애 약이 가장 심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해요. 저는 약을 바꾸기 위해 거의 매주 대학병원을 오갔고, 그렇게 찾아낸 약으로 1년 이상 약물에 의존하는 치료를 병행했어요. 늘 주머니엔 비상약과 상시 복용약을 챙겨 다니던 시절이었죠.

    돌아보면 저는 약이 공황장애보다 더 힘들었어요. 어떤 약은 한없이 기운이 없게 만들고, 어떤 약은 하루 종일 어항 속에 있는 듯 소리가 울리게 하고, 어떤 약은 밤에 몸이 공중에 뜨는 기분을 느끼게 하고, 어떤 약은 한없이 우울하게 만들었죠. 그렇게 조금씩 약과 몸에 적응하며 1년 이상의 시간이 흐르고, 저는 좋아하던 콘서트도 만원 지하철도 피하며 살아가게 되었어요.

    그림 1.2.3 : 약물테스트 기록 (통증일기 중) 1.2.3번의 약물에 대한 부작용 중심의 기록. 관련 약물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힘든 과정이었지만 안정적인 약물을 찾아 투약하게 되었어요.

    “숲에 가서 걸으세요. 명상을 하세요.”

    네네, 하지만 잘 안되는데요?!!! 매주, 혹은 격주로 만나는 주치의의 말이 점차 와닿지 않을 만큼 시간이 흐른 어느 날, 저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미국행을 택했어요. 텍사스주의 광활한 자연을 보기도 하고 미국 동북부 로드트립을 하기도 하면서 한 달 이상을 여유롭게 자연 위주의 장소에서 보낸 뒤였어요. 마지막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들러 혼자 미술관 투어를 하고 집으로 돌아갈 일정으로 샌프란시스코에 들어간 날, 갑자기 약물 부작용이 나타났어요. 온몸의 핏줄을 타고 빨간 반점들이 올라오기 시작한 거예요. 바로 한국의 주치의에게 전화했고, 빨리 병원으로 오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귀국했어요. 샌프란시스코는 그다음에 다시 가야만 했죠.

    그렇게 약물이 가져온 부작용으로 약을 줄일 새도 없이 저는 약을 중단하게 되었어요. 어떤 약을 먹어도 (지금 겪고 있는 혈관염 증상처럼) 핏줄이 붉어지고 열이 나기 시작했어요. 그 증상 때문에 약을 최소화하며 중단을 상의했어요. 그리고는 주머니에 비상약 — 호흡곤란이 올 때 먹을 수 있는 — 만 갖고 다니는 패턴으로 바꿨어요. 한동안 늘 불안했어요.

    제가 스스로 이미 터널 밖에 있다는 걸 잊은 채, 자꾸 다시 터널 속으로 들어가려고만 했죠. 한쪽 주머니엔 늘 약을 넣고 주변을 경계하며, 여전히 공황장애를 두려워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그 패턴도 머지않아 깨지고, 저는 완전히 터널에서 멀어지게 되었어요. 어느 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건축 전시를 보러 홀로 베네치아로 향하는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어요. 그 비행기는 탑승 후 활주로에서만 한 시간이 넘게 대기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기내 산소는 충분히 제 입가로 오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조여왔어요. “이러다 여기서 공황이 다시 시작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거죠. 제 주머니 속에는 비행 중 먹는 안정제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어요.

    “그래, 이번 기회에 진짜 터널을 통과해 보자. 내 스스로 진짜 터널을 없애 보자.”

    약을 한 손에 꼭 쥔 채 한 시간을 버틴 것 같아요. 다행히 한 시간쯤 지나자 비행기는 이륙했고, 저는 이륙과 함께 잠이 든 것 같아요. 차가운 비행기 안에서 혼자 식은땀을 흘렸지만, 저는 끝내 열 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약을 먹지 않았어요. 그렇게 베네치아의 가을밤, 공항에 도착했을 때 저는 진정 터널을 통과했다는 걸 느꼈어요.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시작한 지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저는 살결에 닿는 바람을 느끼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어요. 베네치아 물 위로 부는 바람이 저에게 알려주더군요.

    “너 제대로 살아 있어!” 깨어 있음을, 제대로 느낀 순간이었어요.

    그림 : 스스로 공황장애에서 벗어났음을 느낀 베네치아 → 밀라노로 향하는 기차표. 터널을 지나는 기차안에서 나는 다시한번 내가 어떠한 터널을 빠져나왔는지 깊게 깨닫게 되었다.

    그 후로 공황장애에서 완전히 벗어났을까요? 물론 완벽하진 못해요. 하지만 거의 사라졌고 저만의 몇 가지 방법을 찾아냈어요.

    1. 사람이 많은 곳에 갈 경우, 벽과 맞닿는 한쪽 구석을 꼭 확보해요. 그러면 사람들을 피해 혼자 편안하게 벽에 기댈 수 있어요.
    2. 물을 항상 준비해요. 특히 차가운 물이요. 차가운 물은 정말 많은 도움이 돼요. 순간 이상함이 느껴질 때 차가운 물을 마시면 저는 매우 빠르게 진정돼요.
    3.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자리를 피하는 거예요. 탈출만큼 쉬운 해답은 없으니까요.

    저는 아직도 디스크 수술 후 갑자기 찾아온 공황장애가 이해되지 않아요. 그리고 아주 가끔은, 비슷한 증상이 시작되려는 걸 느끼기도 해요. 하지만 이젠 통제 가능한 범위 안에서, 다시는 터널 속으로 들어가지 않기 위한 방법들 속에서 살아가고 있어요.

    자신의 터널을 스스로 걸어 나오는 건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터널 끝의 탈출구를 보며 치료해야, 어느새 터널 밖이라는걸 발견하게 될거에요.

  • 재활을 넘어 매일 걷는다는 의미

    재활을 넘어 매일 걷는다는 의미

    루틴의 삶, 반복되는 매일

    벌써 7년째, 매일 저녁 집 앞 산책로를 최소 4km~8km까지 걸어요. 너무 많은 비가 오는 날을 제외하면(눈이 오는 날은 오히려 걷기가 즐거워 빠트리지 않아요) 일 년에 열흘 정도를 제외하고 매일 걷고 있어요.

    24년 폭설이 내린 12월

    다행히 제가 사는 동네는 서울과 가깝지만 청계산 자락을 끼고 있는 크지 않은 동네로, 작은 냇가를 끼고 벚나무 사이를 걷는 코스가 다양하게 있는, 말 그대로 걷기 좋은 동네예요.

    처음 이 동네에 정착했을 때는 걷거나 운동을 즐기지 못했어요. 가장 몸이 많이 아프던 시기에 저는 조용하고 산이 가까운 이 동네로 이사 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일 년 후, 온몸에 원인 미상의 정맥순환장애로 인한 두세 번의 시술과 수술을 거치며 저의 몸은 매우 쇠퇴했어요. 특히 잦은 입원으로 근육량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졌고, 근력뿐 아니라 혈관이 없어진 곳곳의 근육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매우 낯선 움직임이었어요.

    처음엔 몸을 움직이기 위한 재활로 집 앞 냇가 근처를 걷기 시작했어요. 첫날엔 5분도 되지 않아 숨이 차고 발바닥과 다리가 모두 퉁퉁 부어 걷기를 포기했죠. 한 달이 지날 즈음엔 15분에서 20분까지 겨우 늘릴 수 있었어요.

    몸은 참 신기하고도 정직하게 계단형으로 회복되어가요. 5분 → 15분 → 1시간, 이렇게 일직선으로 회복되는 게 아니라

    5분 → 15분 → 다시 10분 → 다시 15분 → 20분 → 25분 → 다시 20분 → ……

    이렇게 계단을 올라가면서도 다시 내려가는 기분으로, 몸은 조금씩 회복되는 것 같아요.

    매우 더디긴 했지만, 조바심이 나진 않았어요. 수술하기 전에는 걷지도, 숨이 차서 말도 못하던 시기를 3개월 이상 겪었기 때문에, 이렇게 걷기에만 집중해서 걸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아무도 계단형으로 좋아진다는 것이 계속 앞으로만 나아가는 게 아니라 다시 후퇴하기도 한다는 이야기는 들려주지 않았어요. 조금씩 회복해가는 과정에는 꼭 다시 컨디션이 나빠져 좌절도 하는 도돌이표가 존재했지만, 지나고 보면 체력은 전체적으로는 계단식으로 점차 좋아진 게 맞아요.

    그렇게 1년을 걸었을 때 저는 50분까지 너무 빠르지 않게 걸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2년이 다 채워질 즈음에는 드디어 60분을 넘길 수 있었죠. 그리고 3년이 지날 때쯤부터는 확실히 몸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어요.

    가장 큰 변화는 근력량이 늘어나고 다리에 근육이 잡히기 시작한 몸의 형태 변화였지만, 그보다 더 큰 변화는 ‘걷는다’는 매일의 루틴 속에서 찾아오기 시작했어요.

    3년이 채워진 어느 날 밤, 저는 처음으로 알아차렸어요.

    매일 같은 시간에 걷는다는 것이 단순히 몸의 근육을 늘려주는 것을 넘어, 그보다 더 중요한 ‘뇌를 정화한다’는 학습도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요.

    매일 퇴근 후 비슷한 시간에 저는 저녁을 먹고 바로 걷기를 했어요. 어느 순간 산책로에 들어서면서 제 뇌의 모드가 바뀌는 것을 느끼게 되었죠. 하루의 스트레스나 근심이 꺼지는(off) 신기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어요. 분명 그날 매우 큰 스트레스가 있었는데도, 걷는 장소에 다다르면 기분이 전환되면서 스트레스가 아닌 그 순간의 공기와 바람에 집중하게 되더군요.

    매일 같은 길이지만, 4계절이 있어 매일이 다른길 다른 공기에요.

    이 변화가 저는 너무 신기했어요.

    그래서 그 이후로도 더 큰 이슈가 생기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때면 계속 걸어보곤 했어요. 매일 비슷한 시간, 같은 장소에서 자연을 느끼며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제 뇌는 충분히 정화되고 있었어요. 마치 ‘걷는다’는 행위가 저에게는 ‘뇌의 리셋 버튼’과 같은 느낌을 주었어요. 걷기가 뇌를 회복 상태(recovery state)로 이끄는 자동 스위치처럼 학습된 것 같아요.

    그리고 4년 차가 넘어가자, 이때부터는 걷지 않으면 오히려 몸이 더 힘들어지기 시작했어요. 걷지 않고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서 일한 날은 온몸의 통증과 함께 수면장애를 겪는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죠.

    저의 경우에는 최소 30~40분이 지나야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해요. 그렇게 최소 40분에서 이제는 1시간 30분까지, 가끔은 빠르게,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천천히, 그리고 가끔은 조금씩 뛰기도 하면서 그날의 컨디션에 맞춘 걷기를 하고 있어요.

    그렇게 7년 차인 저는 오늘도 매일 걷고 있어요.

    앞에 언급한 것 처럼 신기하게도 몸은 계단처럼 회복되는데, 가끔은 계단의 디딤판(발바닥이 닿는 가로 부분)이 너무 긴 계단도 나와서 몸이 전혀 개선되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시기도 있고, 가끔은 반대로 내려가는 계단도 나와 절망적이지만, 시간이 지나 몸에 루틴으로 자리 잡고 나면 그때는 확실히 나아지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어요.

    7년 전, 5분 걷기로 시작해 이제는 매일 걷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되기까지, 걷기는 제 몸과 정신 모두를 살리는 너무나 중요한 루틴이 되었어요.

    저는 걷기는 제 몸을 위한 최고의 움직임이자, 최고의 명상이라 생각해요.

    여러분도 저와 같이 걷기의 루틴을 통해 하루의 스트레스까지 날려버리는 브레인 샤워(뇌의 정화)를 느껴보시는 건 어떨까요?

  • 캐리어를 끌고 멋지게 입원해 보자

    캐리어를 끌고 멋지게 입원해 보자

    부모가 당신이 아픈 것을 알고 있나요?

    30대 중반부터는 매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대학병원이란 곳들은 대체로 최대 2주일 이상의 입원이 불가했죠. 일을 열정적으로 하던 시절이라 입원을 해서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어려웠고요. 제 입원은 대개 불을 끄러 들어가는 응급처치 같은 연례행사였어요. 약을 한 알 바꾸는 것도 민감하게 몸의 부작용으로 쉽게 나타나는 바람에, 주로 입원을 통해 검사나 약물 테스트 등을 주기적으로 하던 시절이었어요.

    입원이 잦아지고 익숙해지면서,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저는 병원이 편해지기 시작했어요. 매우 어색한 말이지만, 오히려 병원 밖에 있는 일상보다 병원에서 치료나 검사를 받는 시간에 몸이 더욱 편해지기 때문에, 저에게 입원 기간은 점차 편안해지고 또 의존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캐리어 가방을 끌고 혼자 입원하고 혼자 퇴원하는 것은 물론, 캐리어 안에 책, 카메라, 노트북처럼 나만의 입원을 최대한 편히 보내기 위한 장비들과 함께 입원하기 시작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덜 아팠던 건 분명 아닌데, 점점 매해 하는 입원에 익숙해지면서 입원 때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야간 근무를 하는 병원 내 의료진들을 사진 찍거나(퇴원 후 모두 선물로 전달했어요), 매일 노트북을 켜고 밀린 일을 해내거나, 밀린 책을 읽는 식으로. 나만의 입원 후 시간은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한 환자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죠.

    AI art – 병원 입원을 안식처라 생각하던 시절

    물론 철딱서니 없는 워커홀릭의 모습에 같은 병실을 쓰는 어른들과 주치의 선생님들께 혼도 많이 났어요. 병원에 올 지경까지 일을 하고 몸을 망가뜨려 놓고, 여기 와서도 또 일을 하고 직원들이 병원까지 일을 들고 찾아오게 한다고 꾸중을 듣곤 했죠.

    하지만 어떻게, 정신이 말똥한 시간에 천장만 보고 누워 있을 수 있겠어요? 일 년에 2주를, 30대의 저를 제외하곤 모두가 할머니들인 6인실 한가운데에서, 그게 쉬운 하루하루였을까요? 지금 다시 입원하라고 해도 저는 똑같이 당당하게 캐리어를 끌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해 갈 거예요. 플라스틱 물병에 빨대, 물수건, 슬리퍼 같은 입원 기본 물품보다, 병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저에겐 나다움을 잃지 않는 행위나 물건들이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입원했을 때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요. 특히 나보다 마흔 살은 더 많은 어른들 속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온갖 음식들과 관심이 쏟아지곤 했어요. 1인실보다 6인실에 입원하라고 하는 이유를 저는 경험으로 공감해요. 2인실은 둘뿐이라 서로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어야 해서 더 조심스럽고 예민해지고, 1인실은 처음엔 좋지만 계속 혼자인 저에겐 매우 쓸쓸한 공간이었어요. 적당히 활동이 가능하신 분들로 모아진 6인실은 말 그대로 온갖 어른들의 역경과 인생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쉬려면 타이밍 맞춰 모두가 같이 잠들어야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요. 저는 6인실 중앙, 창도 벽도 없는 자리에 커튼을 사방에 치고 섬처럼 누워서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어른들의 삶과 아픈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많이 키득댔던 기억이 있어요.

    병실의 아침은 매우 일찍 시작되고 일찍 마감되죠. 아침 일찍(5시경) 하는 혈압, 피검사와 소독 냄새가 나는 대걸레를 들고 조용히 바닥을 치우고 가시는 미화원 선생님에 의해 모두가 함께 기상하죠. 7시경부터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식사와 투약, 그리고 아침 주치의의 회진을 기다리며 환자들은 대기 모드로 들어가죠. 저녁엔 더 일찍 마감돼요. 저녁 6시경 먹는 밥과 다 같이 동시에 먹는 저녁 투약이 끝나면 빠르면 8시, 늦으면 9시엔 잠이 들게 되어 있죠. 물론 밤새 아프신 분들, 검사하시는 분들로 인해 잠을 뒤척이게 될 때도 많지만, 다인실 커튼 안에서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하루가, 이틀이, 그렇게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가죠.

    혼자 입퇴원이 익숙해질 무렵, 어느 분께서 저의 침대로 오셔서 이야기하셨어요.

    “가족이 없어?”

    “아니에요. 언니랑 동생이 주말에 왔었어요.”

    “아니, 부모가 없어?”

    “아, 아니에요.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이야기를 못 했어요.”

    “그러는 거 아니야. 자식이 아플 땐 부모가 같이 아파야 하는 몫이 있어. 엄마에게 빨리 전화해서 아프다고 이야기해. 그럼 더 빨리 나을 거야. 젊은 사람이 참 혼자 안됐네.”

    그렇게 병원을 가거나, 혼자 앰뷸런스를 타면서 “혼자세요? 혼자 사세요? 위험한데…” 같은 말은 들어봤어도, [부모의 몫]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어요. 매번 씩씩한 척했던 제가 ‘나 혼자 아파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한 말이었죠.

    그 후로 어땠냐고요? 물론 한동안 부모님께 계속 말하진 못했어요. 내가 왜 아픈지, 내가 왜 입원해야 하는지조차 뚜렷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요. 여전히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걱정을 덜 전하고 싶어서였는지, 그게 아니면 혼자 씩씩하고 센 척하기 위해서였는지, 지금도 그때의 감정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 제 전신의 혈관이 모두 일을 멈추고 심각한 수술대 앞으로 향하기 직전, 저는 엄마에게 알렸어요.

    “엄마, 같이 있어줄 수 있어?”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오셨고, 제가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음식들을 챙기시며 밤새 통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저를 곁에서 지키셨죠.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병원 투어와 시술, 수술들을 엄마 손을 잡고 함께했죠. 엄마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제가 사라질까 너무 두려웠다고 이야기하세요. 아마도 저보다 더 간절했던 엄마의 기도와 보살핌으로 제가 건강을 많이 회복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거라 생각해요.

    선글라스를 끼고 캐리어를 끌며 혼자 입퇴원을 하던 30대의 저는 사라졌어요. [부모의 몫]은 부모가 아파해야 하는 몫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다시 보호받아야 하는 몫이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엄마를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죠? 이젠 제가, 엄마가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딸이 되어야겠죠. 하지만 엄마도 과연 자식에게 아프다고 연락을 하실까요?

    “딸, 아픈데 와 줄 수 있어?” 그런일은 더더욱 쉽지 않겠네요.

  • [30대] 의사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30대] 의사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공황장애 약을 투약하기 시작하던 시기부터였을까? 30대 중반부터 후반으로 치닫는 최고의 통증 복합 시기에 정말이지 솔직히 의사선생님에게 말하지 못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분명 눈을 감았는데 눈앞에 너무 다양한 사람 얼굴 같은 형상이 보이고,

    분명 귀를 막았는데 내 몸속에 흘러다니는 피의 소리까지 다 들리는 듯했고,

    분명 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먹었는데 머리 속 망치를 두들기는 순간의 통증을 느끼곤 했죠.

    이런 말을 하면 신경정신과의 진단명이 늘어날까 두려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어요.

    몸은 한시도 같은 자세로 앉기도, 눕기도, 서기도 어려울 정도로 갖은 통증이 달라붙어버린 상황이 되었어요. 디스크, 족저근막염, 섬유근육통이라 불리는 물리적 통증을 유발하는 병명부터 CPS까지, 내 몸의 모든 통증을 느끼는 모든 감각이 다 깨어 있던 시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진단명 앞에 매우 스키니해서 지방과 근육이 극히 부족했던 신체 조건은 망각하고, 쌓여가는 진단명과 약물을 기반으로 통증을 이겨보려 했던, 통증이 없던 시절이 기억조차 나지 않던 일상이 가장 힘든 시기였죠. 시간이 지나 온몸의 정맥들까지 통증의 신호를 보내며, 다발성 정맥 손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통증은, 여전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떠한 통증보다 가장 강하고 순간적이며 잠들 수 없는 통증이었다고 기록할 수 있어요. 어느 누구도 어떠한 통증이 어떠한 증상이라고 제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제가 이곳저곳, 여기저기 너무 다채롭게 통증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자 받았던 CPS – Central Pain Syndrome (중추성 통증 증후군(Central Pain Syndrome)은 뇌, 뇌간, 척수 등 중추신경계의 손상이나 질병,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병성 통증 https://en.wikipedia.org/wiki/Central_pain_syndrome 발췌)을 진단받고 한동안 관련 약물을 통해 다발성 통증을 막아보려 했었어요. 하지만 그 약마저 혈관통은 뚫어내는 것을 경험하면서 CPS가 아닌 다른 증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었어요.

    환자로서 의사분께 설명하기 참 어려웠어요.

    매주 증상은 바뀌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증상이 변화하면서 쌓이다 보니 내가 느끼는 통증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의문이었어요. 아마 공황장애 때부터 통증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내가 설명하기 어려운, 약물을 먹은 후의 반응, 그리고 내 몸 부위의 통증 등을 노트에 기록하며 병원을 방문할 때 보여드리곤 했어요. 이 방법은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대학병원의 짧은 의사와의 인터뷰를 위해서 준비하는 저만의 기록법이긴 해요.

    통증의 변화하는 부위, 약물을 먹고 반응이 나타나거나(두드러기, 두통 등), 증상이 나타난 후 DAILY 변화 등을 저는 저의 노트에 틈틈이 기록하여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단 몇 분 안에 설명을 하곤 해요. 몸이 가장 극도로 예민하거나 지속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짧은 의사와의 만남에서 내가 겪는 고통이나 불편함을 정확히 설명하긴 참 어렵죠.

    저는 의료진을 신뢰하고, 의료진을 만날 때 최대한 내가 겪은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려고 노력해요.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은 개인마다 증상도 상이하고, 질병을 치유해나가는 방법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어요.

    좋은 의료진을 만나 나의 질병을 잘 설명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치료를 통해 나아가는 과정에는 ‘과연 내가 어떠한 상황인가’를 잘 설명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질병도 겪을수록 는다고, 저도 처음엔 그러지 못했어요. 디스크 수술을 하고 재활을 못 하고 병원을 전전할 때는 병원을 불신하기 급급했죠. 노력 없는 나의 식습관과 재활 운동에 대한 반성, 그리고 정확한 증상의 설명은 모두 누락한 채, 의사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곤 했죠.

    ‘누가 이랬더니 좋아졌다더라’라는 일명 썰은 저는 믿지 않아요.

    ‘이거도 한번 해봐, 저기도 한번 가봐’라는 주변의 추천도 저는 잘 듣지 않았어요. 그러기엔 너무 많은 질병이 있었고, 그 질병이 주는 복합적 통증은 저 말고는 아무도 느끼지 못했으니 더더욱 그랬죠.

    대신 질병을 겪으면서 나 스스로 노력해보고, 기록해보고, 도전해보고, 나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의료진과 최대한 많이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틈틈이 다양한 의료진들이 쓴 책을 통해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죠.

    img) 2025.12.15~25일까지 급성 괴사성혈관염 기록일지. 응급실과 3개의 진료과를 위한 기록
    의료진을 만나면, 짧은 시간안에 증상과 다른 병원에서의 치료과정을 같이 공유하는 도구가 되었죠.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는 결국 나 자신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한번 잘 따라가 보세요. 그리고 만약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기록해보세요. 언젠가 그 기록이, 당신의 몸이 많은 신호를 주었다는 증거로 도움이 될 거예요. 단, 너무 예민해지진 말기. 이 부분이 저는 가장 어려웠어요. 허나 신기하게도 통증과 투약정보 그리고 투병의 과정을 기록하면서 내 스스로 몸을 깨닫고 아픈 나를 인정하게 돌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저보다 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병과 슬기롭게 싸워가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며.

  • [30대] 약 대신 소고기를 한 점만 매 끼니 구워 드세요.

    [30대] 약 대신 소고기를 한 점만 매 끼니 구워 드세요.

    회복되지 않는 허리디스크 수술, 원인은 단백질 섭취

    30대 중반, 갑자기 찾아온 척추 3번-4번 추간판 탈출증(허리디스크)으로 인해 수술을 하게 되었어요. 매일 앉아서 밤을 새우며 건축설계를 하던 시절, 최소 하루 12~20시간 이상 의자에 앉아 있었죠. 20대 초반부터 그런 습관으로 컴퓨터 작업을 하다 보니 목디스크 및 허리디스크 진단은 20대 후반에 바로 받게 되었어요.

    매일 요가도 하고 PT도 하며 어떻게든 체력을 키워 보려고 했지만, 결국 35살이 되던 해에 수술대에 오르게 되었어요. 수술까지는 문제가 없었어요. 그리고 수술 후 1개월 정도면 충분히 일상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말을 믿고 저는 겁도 없이 부모님께는 알리지도 않고 수술을 받았어요. 수술 후 밤새 지속되던 다리 저림 등이 사라지면서 만족도는 매우 높았어요. 하지만 문제는 한 달이 지난 이후부터였어요.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고, 세 달이 지나도 저의 몸은 복대 없이 기립하고 걷기가 매우 힘들었어요. 처음에는 30대 초반에 진단받은 섬유근육통에 의한 통증인지 혼동될 정도로, 서 있거나 걷는 것 자체가 또다시 통증의 시작이 되었죠.

    2012.08.15 디스크 수술 후 +25일. 복대를 차고 침대에 누워 답답한 일상을 하며 남긴 그림 by seaon

    그렇게 몇 개월을 복대를 차고 스탠딩 테이블에 서서 일을 하는 날들이 늘어났어요. 그 시절 저의 BMI(체질량지수)는 17.9로 저체중에 속하는 범위였죠. 그리고 더 심각한 건, 인바디 그래프가 M에 가까운, 말 그대로 근육은 없고 뼈와 지방으로만 구성된 몸이었어요. 허리에 힘을 주고 걷고 싶어도 허리 주변에 근육이 없어 복대를 푸를 수 없었던 거죠.

    3개월이 지나고도 몸이 좋아지지 않자 저는 재활병원을 전전하게 되었어요. 그렇게 찾아간 대학병원의 재활의학과 전문의가 저에게 한소리를 하시더군요.

    “대체 음식을 어떻게 먹고 있는 거죠? 단백질을 잘 섭취하긴 하나요?”

    “아, 저는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atarian)—생선과 유제품은 먹지만 육류는 배제한 식사—예요. 달걀이나 우유는 잘 먹는데…”

    “본인 키에 몇 g의 단백질을 먹어야 하는지 알고 있나요?”

    “달걀 두 개…?”

    “아, 그러니 몸에 근육이 하나도 없죠. 저라면 약처럼 매 끼니 소고기 한 점씩이라도 구워 먹겠어요. 약이다 생각하고 소고기를 구워 드세요. 그러면 빨리 회복할 겁니다.”

    머릿속이 하얘졌어요. 30대 중반의 저는 몇 그램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는지도 몰랐지만, 10살 무렵 자발적으로 선택한 페스코 베지테리언(Pescatarian)-해산물과 달걀, 유제품은 섭취하고 육식은 멀리하는 식이-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왔죠.

    인터넷에 정보가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던 2010년대 초반, 사실 나에게 맞는 단백질 섭취량을 확인하는 것조차 이해하기 쉬운 내용은 아니었어요. (참고: 1일 단백질 섭취량 체중 1kg당 0.8~1g) 그리고 최근 메디쏠라를 운영하면서 소장님을 통해 더욱 깊이 알게 된 사실은, 단백질을 하루 필요량만큼 한 끼에 몰아서 먹는 게 아닌 매 끼니 나눠 먹어야 한다는 사실이었죠.

    “아, 내가 낫지 않는 것은 내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섭취하지 않아서구나”를 깨달은 첫 번째 사건이죠. 물론 그 후로도 꾸준히 편식과 영양 불균형을 바꾸지 못해 더욱 오랫동안 다양한 질병들을 겪게 되었지만,

    10살 무렵, 음식이 풍족하고 육식 위주의 반찬이 많았던 가정에서 자란 저는 스스로 육식을 멀리하는 식사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학교에서 [포유류]의 개념을 배운 후 스스로 육식을 멀리하게 되었죠. 어린 저에겐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순수함이 가져온 결과가 35살의 디스크 수술 이후 근육이 생성되지 않아 재활이 쉽지 않는 식습관까지 연결되었죠.

    물론 10대 시절까지는 엄마의 식단 조절 덕분에 다양한 어류와 콩류 등을 통해 충분한 단백질을 섭취했었죠. 문제는 20대 이후, 마음껏 편식을 하며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를 통해 단백질에서 점차 멀어졌다는 사실이에요. 또한 프로틴 쉐이크 같은 보조제를 통해서라도 추가 섭취를 해야 한다는 개념조차 몰랐던 거죠.

    그렇게 병원에서의 충격을 뒤로하고, 저는 오랜 식습관을 끊기로 결심했어요. “고기를 약처럼 먹겠다”라는 결심을 하고 조금씩 단백질 섭취를 늘리려 노력했죠.

    단백질 섭취를 고민하던 그 시절, 저는 국내 굴지의 육가공 전문 중견기업(S Food)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고 있었어요. 회사의 육가공 전문공장을 설계할 기회와 새로운 육가공 식문화 브랜드를 만들 기회가 눈앞에 와 있었죠.

    “고기 맛도 모르는데 육가공 브랜드를 만드실 수 있겠어요?”라는 회사 대표님의 말에 저는 호기롭게 이야기했죠. “제가 고기 맛은 몰라도 비건 소시지는 잘 만들 자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디스크 수술로 깨달은 단백질의 중요성을 통해 저는 건축가의 길에서 육가공이라는 단백질 전문 회사의 길로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계기를 맞이한 거죠.

    그 후로 어떻게 되었을까요? 저는 존쿡델리미트(JOHNCOOK DELIMEATS)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운영하며, 육가공 회사에서 10년의 시간 동안 누구보다 다양한 프로틴의 중요성을 깨닫고, 이제는 고기 맛을 기가 막히게 잘 아는 사람이 되었죠.

    제가 그때 “고기를 약처럼 먹으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았다면, 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요?

  • 아프면 일을 꼭 멈춰야 하나요?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아닌 워헬밸(Work-Health Balance)

    “왜 일을 그만두지 않아?” “왜 요양을 떠나지 않아?” “왜 그렇게 계속 일을 하고 살아?” “아프다며, 휴직 좀 하지 그래.”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꾸준히 들었던 이야기예요. 사람들은 질병이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저에게 그만 일하고 “쉬어라”라고 조언하곤 했어요. 물론 활동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프면 쉬기 위해 휴직, 휴가도 가고, 집에 틀어박혀 며칠을 보내기도 했어요. 하지만 일을 그만둘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대체 왜일까요. 지금 다시 돌이켜 봐도 질병의 굴레 속 고통의 터널은 계속 이어졌고, 몸의 통증과 컨디션은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가속화되었는데, 왜 저는 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요.

    10대 시절의 주치의는 사회생활이 힘든 몸이라고 경고했어요.

    20대 때는 사회생활 후 1년의 시간을 휴직까지 했었어요. 그렇게 1년을 호주에서 요양이나 다름없는 시간을 보냈죠. 하지만 젊음이 아름다운 건 두려움이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자신의 몸에 대한 자만이 가장 넘치던 시절이기도 했어요. 건축 일을 하며 밤을 새우던 생활이 결국 휴직까지 이어졌지만, 복귀 후에도 저는 더 강해져야 한다는 착각에 빠져 밤을 새우면서도 낮에는 요가를, 저녁에는 한 시간씩 PT를 받으며 젊음을 연료 삼아 스스로를 더 태워버렸어요.

    30대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다양한 증상과 질환이 늘어갔어요. 마치 둑이 무너진 것처럼, 병원에 가면 늘어나는 진료과와 질병에 정신을 못차릴 정도였어요. 하지만 역시나 30대의 저도 제 즐거움이 먼저였어요. 1년에 열 번 이상 비행기를 타며 틈만 나면 해외여행을 갔고, 그 모든 걸 일을 위한 인사이트 혹은 휴식이라고 스스로에게 핑계를 댔죠. 활동을 줄일 생각도 하지 않고, 생활 습관을 바꿀 상상조차 하지 않은 채, 그저 병원과 일, 그리고 여행에 몰입되어 살았던 시절이에요. 저에게 휴식이란, 여행으로 쌓여가는 피로를 휴식이라고 착각했던 시기였던 거죠.

    30대 말 가장 큰 고비를 넘기면서, 그때서야 조금씩 제 몸을 이해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그 시절 많이 언급되던 워라밸(Work-Life Balance)이 아닌, 저에게 긴급과제인 워헬밸(Work-Health Balance)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매일 10분씩 재활차 시작한 걷기는 하루 최소 5km~ 8km를 걷는 루틴으로 바뀌었고, 주말이면 종종 혼자 산에 오르고, 매주 1회 필라테스를 13년째 하는 중이에요. 물론 메디쏠라를 시작하면서 어떻게 먹어야하는지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고민하고 노력중이죠. 하지만 일과 건강에 대한 나만의 기준과 균형을 찾아간다는건 운동만큼 루틴화 되긴 어려웠어요.

    가장 중요한 건 뻔한 엄마의 잔소리처럼 “잘 먹고, 잘 자고, 규칙적으로 생활하기”지만, 일을 하다 보면 사실 그 균형은 순간의 스트레스나 고민으로 쉽게 깨지곤 하죠. 그래도 자신의 몸을 가장 잘 아는 건 결국 자기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기록을 해보는 것도, 루틴을 만드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다음의 두가지에요.

    1. 자신의 상태가 너무 두려운 나머지 스스로 노력을 덜 하지 않기.
    2. 오늘 조금 나아진 컨디션에 건강했던 시절의 습관을 다시 꺼내지 않는 것.

    말 그대로 나의 상태를 알고, 나만의 밸런스(Balance)를 찾는 것이 가장 큰 핵심이에요. 그리고 그 밸런스는 위로 올라가는 건(+) 정말 어렵지만, 떨어지는 건(-) 한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해요. 아주 오랜 시간 꾸준히 노력해야만 건강이라는 지표가 조금씩 올라가지만, 반대로 질병을 겪거나 지병을 가진 분들이라면, 아주 조금만 방심해도 그 밸런스가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이미 경험해보셨을 거예요. 저 역시 수많은 경험을 통해, 제 일과 삶의 건강 밸런스를 아주 적은 오차 범위 안에서 조정할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34살 때, 심한 공황장애를 겪었어요. 결국 공황장애 약의 부작용으로 약을 중단하면서 급격하게 증상에서 벗어나게 되었지만, 그 당시 무방비 상태로 겪었던 증상에 크게 놀라 외부 활동을 모두 줄이고 스스로 움츠러들었어요. 그때 서울 혜화동의 한 대학병원 신경정신과 주치의께서 제게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떠올렸을 때 가장 행복한 게 무엇인가요?”

    “저는 건축 설계를 하고, 쉴 때는 여행하는 게 가장 좋아요.”

    “그럼 그걸 계속하세요. 어떤 상황이 와도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이 터널을 빠져나오느냐 마느냐도 결국 본인의 의지가 매우 중요해요. 사람은 가장 좋아하는 걸 할 때 가장 쉽게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몸이 아파도 절대 일을 중단하지 마세요. 당신에게 일은 곧 행복이니까요.”

    사실 주치의의 그 말은, 30대의 저에게 또 한 번의 위기를 넘게 해준 중요한 희망의 메시지였어요. 결국 저는 공황장애 약을 손에 쥔 채 비행기에 올랐고, 숨이 막혀오는 순간들을 버텨내며 그때 가장 가고 싶었던 이탈리아 베네치아 공항에 도착했고 2년간의 공황장애에서 벗어나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얼굴을 스치는 바람결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저는 워헬밸(Work-Health Balance)을 이루는 데 10년이 조금 넘게 걸린 것 같아요. 저 자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많은 시간이 걸렸고, 그 시행착오와 실행의 과정 속에서 많은 책과 전문가들의 이야기가 큰 도움이 되었어요. 물론 나에게 적용하는건 쉽지 않았지만,

    여러분의 워헬밸(Work-Health Balance)은 잘 지켜지고 있나요?

  • [40대] 60살에 저는 건강 평균은 될 수 있겠죠?

    [40대] 60살에 저는 건강 평균은 될 수 있겠죠?

    40에 다시 시작하는 몸, 다시 시작하는 식사

    30대 중반에 시작한 질환 판정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온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다양한 통증으로 가득했고, 단 하루라도 몸이 편했던 느낌이 무엇인지 점점 흐릿해져 갔어요.

    점점 통증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나는 멀어지고 있었죠.

    30대 말, 원인 미상의 다발성 정맥 손상으로 인해 제 몸에는 150회가 넘는 주사바늘이 온몸에 꽂혔어요.크고 작은 시술과 수술을 통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정맥들을 하나씩 없애는 과정을 몇 달에 걸쳐 진행했어요. 단순한 하지정맥 문제가 아니었어요.

    몸 전신의 정맥들이 피를 심장 방향으로 되돌리는 기능을 서서히 멈추고 있었거든요.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주변에서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어요.

    “어떻게 좌절하지 않으셨어요?”

    6개월 사이 체중은 7kg 이상 빠르게 빠졌고, 상시적인 브레인 포그, 심각한 소화장애, 난생처음 겪는 혈관 통증으로 매일 밤이 악몽 같았어요. 수면제도, 진통제도 잠재울 수 없는 끔찍하고 돌발적인 통증들이 온몸 곳곳에서 자주 나타나곤 했죠.

    그럼에도 좌절을 하거나 무언가를 탓하기엔, 저는 원인을 알 수가 없었어요.

    6개월 동안 3곳의 대학병원, 7개의 진료과를 방문하며 다양한 검사를 받았지만 끝내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결국 ‘원인 미상’이라는 질환 코드가 붙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저는 너무 괴로웠어요.

    ‘번개가 몸에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

    싶을 만큼, 매일 이해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려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좌절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저는 좌절보다 “왜, 대체 왜”가 더 궁금했어요. 원인만 찾으면 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거든요.

    끝까지 원인 미상으로 남았지만, 돌이켜보면 오랜 영양 부족과 어릴 때부터 복용해온 약물들, 그리고 저의 잘못된 생활습관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은 저에게 위로의 공간이기도 했어요.

    진단 코드가 하나씩 늘어나면서도 ‘그래도 이 정도여서 다행이다’ 싶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병원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겪는 통증들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었어요. 다만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낫기만 바랐던 무지한 환자였던 건 사실이에요.

    그 고통의 시간을 수술로 통과하면서, 오히려 저는 희망을 얻었어요!

    메디쏠라의 김형미소장님(당시 S병원 영양팀장)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지금부터 5년만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지금 오메가3 섭취가 정말 중요하지만, 갑자기 너무 많이 드시는 건 오히려 무리예요. 영양이 너무 손실된 몸에 갑자기 과다한 영양이 들어가면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드시는 양은 최대한 유지하되, 자주 드시고 단백질 섭취는 꼭 빠트리지 마세요. 지금부터 5년이면 기능을 잃은 혈관들을 대신해서 많은 부분이 회복될 거예요. 40대에 시작하는 5년이지, 20대였다면 훨씬 빨랐을 텐데…”

    농담으로 마무리하셨지만, 소장님의 말은 저에겐 정말 반짝이는 등대 같았어요.

    ‘아, 나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지금부터라도 규칙적으로 영양의 균형을 맞춰 먹기 시작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몸은 충분히 회복할 수 있구나!’

    그리고 한 가지 더 큰 목표를 세웠어요.

    38년간의 대학병원 생활을 마치고 메디쏠라에 합류해 주신, 정말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 소장님을 보면서요.

    ‘그래, 지금부터 노력해서 60살에는 소장님만큼은 못되어도, 그 나이 평균 정도의 건강을 회복해야겠다!’

    30대에 70대의 몸 상태를 진단받았던 제가, 40대가 되면서 오히려 60살에는 또래보다 더 건강해질 거라는 20년 장기 계획을 세운 거예요.

    사진 – 수술 5년 후, 맨발등산에 푹 빠졌죠.


    7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사이 가장 큰 변화는 메디쏠라가 탄생했다는 점이에요.

    수술 이후 재활로 시작했던 걷기는, 이제 거의 매일 5~7km를 걷는 루틴으로 자리 잡았어요. 오랫동안 망가진 식습관도 모두 내려놓고 저는 철저히 소장님께서 알려주신 꼭 필요한 영양의 원리와, 필수지방산을 위주로 저에게 맞는 식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통증이 없던 시절의 몸 컨디션을 이제는 상상할 수 있어요.

    아마도 60세에는, 또래 중 가장 건강한 제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