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2주 부터 시작하는 비상약준비
추석을 맞아 가족들과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푹 쉬고 싶었지만, 저는 이번에도 출장길에 올랐어요. 지금 저는 미국 뉴욕주에 와 있습니다.
적게는 1년에 3~4번, 많게는 10번까지. 비행기를 타는 일은 어느새 제 삶의 일부가 되었어요.
제 여행은 20대 초반, 전 세계의 좋아하는 공간을 직접 다 보겠다는 다짐에서 시작되었어요. 건축 유학을 떠나는 비용과 평생 여행하며 건축물을 보러 다니는 비용을 대략 계산해 보니, 복리까진 따져보진 못했지만 비슷하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본격적인 여행은 대학원 시절부터였어요. 한 달만 다녀오겠다던 유럽 건축 기행은 두 달을 훌쩍 넘기기 일쑤였고,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야 겨우 돌아와 수업을 듣곤 했죠. 여행을 일상으로 만드는 계획은 아주 단순했어요. 열심히 공부하거나 일하다가 어느 정도 여행 자금이 모이면 그냥 떠나는 거예요. 유학 비용을 스스로 1/n로 나눠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뒤로, 저는 여행을 제 인생에서 가장 긴 프로젝트이자 가장 긴 투자로 정하고 두려움 없이 실행해 나가기 시작했어요.
매년 유럽에 가기도 하고, 가까운 아시아 나라들은 겁도 없이 자주 드나들었어요. 20대에는 2년 동안 호주에 머물며 끝없는 로드트립을 했죠. 이 모든 것이 건축을 위한 경험이라 여기며, 저는 점점 한국에서 몰입해 사는 삶과 무언가를 찾고 채우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는 삶을 구분하기 시작했어요.
여러 나라에서 로드트립을 했고, 한 달 넘게 기차에서만 잠을 잔 적도 있어요. 한 도시에 푹 빠져 계획에도 없이 프라하에 한 달간 머물기도 했죠. 참 용감하고도 무모했던 인생 계획은 해마다 설렘과 함께 차곡차곡 이어졌어요. 그리고 건축 일을 하며 다닌 여러 답사와 협업 출장을 통해 현지 문화에 더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어요.
물론 그 과정에서 제 식사는 무척 제한적이었어요. 그 멋진 곳에서 다양한 문화의 음식을 맛볼 기회를 모두 저버리고, 식빵과 잼, 약간의 과일이나 요거트가 20대 여행 음식의 전부였죠. 스스로 번 돈으로 빠듯하게 모험하던 저에게는 그게 최선이었어요. 여행지에 조금이라도 더 오래 머물기 위해 가장 많이 아낀 것이 바로 식비였거든요. 맥주 한 캔은 마셔도, 맛있는 현지 음식을 즐기는 여유를 갖기까지는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30대 중후반, 식품회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커리어가 바뀌면서 음식과 문화에 대한 관심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어요. 돌아보면 건강에 경고등이 켜지면서 의식적으로 음식을 더 챙겨 먹으려 했던 시기와도 겹치네요.
20대 중반에는 1년에 최소 34회, 30대 초중반 이후에는 1년에 7-10회 정도(출장 2~3회, 나머지는 개인 여행)를 떠나게 되면서 제 여행 가방 속 물건들의 비율외 중요도도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시작은 첫 일본 여행에서 겪은 아나필락시스였어요. 바르셀로나 직항이 없던 시절에는 도착해 보니 수하물이 오지 않았던 일도 있었죠. 다음날 아침 먹을 약이 없었던 거죠. 그 뒤로는 부치는 짐과 기내 짐 양쪽에 비상약을 두 배로 챙기기 시작했어요.
밀라노 디자인위크에 참가했을 때도 잊을 수 없어요. 혈관 상태가 악화되기 전쯔음, 하루 2만 보(약 10km) 넘게 걸어야 하는 전시관들을 3일 동안 돌아보다가 발바닥 혈관이 터져 걷지도 못하고 밀라노에 누워 있었어요.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 통증에 걸을 수조차 없게 되자, 결국 비행기표를 바꿔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공황장애 약의 부작용으로 일주일치 숙박비를 포기하고 급히 귀국한 적도 있어요. 그뿐일까요. 방콕에서는 심한 고열에 시달려 5일 내내 숙소에 누워 똠얌꿍 국물과 약만 먹다 돌아온 기억도 있어요. 2년 전 런던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어요. 가방 안에 비상 항생제 한 알이 없었다면 저는 비행기를 타지 못했을 거예요.
생각해 보니 항공사에 전화를 걸어 “Emergency”라고 말하고, 스스로 표를 바꿔 집으로 겨우 돌아온 적이 꽤 여러 번 있었네요. 돌이켜보면 무모하고 위험했던 순간도 분명 있었지만, 그게 저를 멈추게 하지는 못했어요. 최대한 많이 보고, 많이 경험하며 살겠다는 인생의 목표는 20대 초반의 그때와 지금도 똑같거든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제 가방은 점점 커지고 있어요. 여행 때마다 챙겨야 하는 비상약 때문이에요.

Img- 이번 출장길의 제 상비약, 비상약들의 모습
중요한 장거리 출장이라면 저는 2주 전부터 가방을 준비해요. 병원에서 처방받아야 하는 약들이 있기 때문이죠. 꼭 필요한 약이 빠져 있다면 미리 병원에 가서 처방을 받아 둬요. 매일 먹는 약부터 항생제, 스테로이드, 항히스타민제까지 모두 의료진에게 처방받은 약으로 준비해야 해요. 이제는 나이와 경험 덕분에 제 몸에 어떤 증상이 나타날지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되어, 준비해 간 약으로 필요할 때 스스로 조절하고 있어요.
게다가 저는 이부프로펜 계열 약에도 심한 부작용이 있어서, 사소한 감기약부터 극심한 변비에 대비한 식이섬유제까지 세심하게 챙겨야 해요. 옷가방보다 약가방이 더 작을 때도 있어요. 아이러니하죠?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심란하지만, 이건 제가 여행하는 방법이에요. 현지에서 제 증상과 약물 민감성을 모두 설명하면 어떤 의사도 선뜻 처방하지 못하거든요. 다들 빨리 큰 병원에 가라고 하지만, 지금 있는 뉴욕만 해도 한국까지 16시간을 날아가야 하죠. 어찌 보면 저 자신을 돌보는 가장 작은 방법이지만, 이제 비상약 가방은 제 여행 가방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어요.
이제 16시간을 날아가면 한국에 도착하겠네요. 집에 가면 가장 먼저 비상약 가방을 꺼내 제자리에 둘 거예요. 그리고 다음 달 또 다른 출장을 위해 약의 유효기간과 이번에 쓴 약들을 확인하고 다시 채워 두겠죠. 조금 번거롭고 귀찮지만, 이것이 스스로와 타협하며 인생의 목표를 채워 가는 저만의 가장 성실한 방법이에요.
그리고 비상약 가방을 볼 때마다 늘 생각해요.
“언젠가 이 가방 속 약들에서 해방되는 날이 오겠지?”
Tip. 저는 시차 적응을 위해 별도의 수면보조제를 먹지 않아요. 최대한 현지 시간에 맞춰 잠들려고 노력하죠. 출장 중에는 처방받은 무기력 개선제(스티몰)로 몇일의 아침은 체력을 챙겨요. 홍삼처럼 면역계를 자극하는 건강기능식품은 따로 먹지 않아요. 밤에는 최대한 일찍 잠들고 비타민이 풍부한 현지 과일을 챙겨 먹는 것. 이것이 여행지에서 피로를 빨리 풀고 현지 시간에 적응하는 저만의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한국에서는 잘안되지만 오히려 여행지에서 더 철저한 방법이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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