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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캐리어를 끌고 멋지게 입원해 보자

    캐리어를 끌고 멋지게 입원해 보자

    부모가 당신이 아픈 것을 알고 있나요?

    30대 중반부터는 매해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잦아졌어요. 대학병원이란 곳들은 대체로 최대 2주일 이상의 입원이 불가했죠. 일을 열정적으로 하던 시절이라 입원을 해서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도 어려웠고요. 제 입원은 대개 불을 끄러 들어가는 응급처치 같은 연례행사였어요. 약을 한 알 바꾸는 것도 민감하게 몸의 부작용으로 쉽게 나타나는 바람에, 주로 입원을 통해 검사나 약물 테스트 등을 주기적으로 하던 시절이었어요.

    입원이 잦아지고 익숙해지면서, 병원에 입원하러 가는 저는 병원이 편해지기 시작했어요. 매우 어색한 말이지만, 오히려 병원 밖에 있는 일상보다 병원에서 치료나 검사를 받는 시간에 몸이 더욱 편해지기 때문에, 저에게 입원 기간은 점차 편안해지고 또 의존하게 되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부터는 캐리어 가방을 끌고 혼자 입원하고 혼자 퇴원하는 것은 물론, 캐리어 안에 책, 카메라, 노트북처럼 나만의 입원을 최대한 편히 보내기 위한 장비들과 함께 입원하기 시작했죠. 지금 돌이켜 보면 덜 아팠던 건 분명 아닌데, 점점 매해 하는 입원에 익숙해지면서 입원 때 할 수 있는 다양한 일들을 만들어내기 시작했어요. 카메라를 들고 야간 근무를 하는 병원 내 의료진들을 사진 찍거나(퇴원 후 모두 선물로 전달했어요), 매일 노트북을 켜고 밀린 일을 해내거나, 밀린 책을 읽는 식으로. 나만의 입원 후 시간은 마치 휴양지에 온 듯한 환자의 모습으로 점차 바뀌고 있었죠.

    AI art – 병원 입원을 안식처라 생각하던 시절

    물론 철딱서니 없는 워커홀릭의 모습에 같은 병실을 쓰는 어른들과 주치의 선생님들께 혼도 많이 났어요. 병원에 올 지경까지 일을 하고 몸을 망가뜨려 놓고, 여기 와서도 또 일을 하고 직원들이 병원까지 일을 들고 찾아오게 한다고 꾸중을 듣곤 했죠.

    하지만 어떻게, 정신이 말똥한 시간에 천장만 보고 누워 있을 수 있겠어요? 일 년에 2주를, 30대의 저를 제외하곤 모두가 할머니들인 6인실 한가운데에서, 그게 쉬운 하루하루였을까요? 지금 다시 입원하라고 해도 저는 똑같이 당당하게 캐리어를 끌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시간을 병원에서 보내기 위해 만전의 준비를 해 갈 거예요. 플라스틱 물병에 빨대, 물수건, 슬리퍼 같은 입원 기본 물품보다, 병원에서 홀로 시간을 보내는 저에겐 나다움을 잃지 않는 행위나 물건들이 더 필요했던 것 같아요.

    입원했을 때 에피소드가 너무 많아요. 특히 나보다 마흔 살은 더 많은 어른들 속에 혼자 누워 있을 때면 온갖 음식들과 관심이 쏟아지곤 했어요. 1인실보다 6인실에 입원하라고 하는 이유를 저는 경험으로 공감해요. 2인실은 둘뿐이라 서로의 숨소리까지 듣고 있어야 해서 더 조심스럽고 예민해지고, 1인실은 처음엔 좋지만 계속 혼자인 저에겐 매우 쓸쓸한 공간이었어요. 적당히 활동이 가능하신 분들로 모아진 6인실은 말 그대로 온갖 어른들의 역경과 인생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쉬려면 타이밍 맞춰 모두가 같이 잠들어야만’ 쉴 수 있는 공간이었는데요. 저는 6인실 중앙, 창도 벽도 없는 자리에 커튼을 사방에 치고 섬처럼 누워서 이어폰 너머로 들리는 어른들의 삶과 아픈 이야기, 가족 이야기를 들으며 혼자 많이 키득댔던 기억이 있어요.

    병실의 아침은 매우 일찍 시작되고 일찍 마감되죠. 아침 일찍(5시경) 하는 혈압, 피검사와 소독 냄새가 나는 대걸레를 들고 조용히 바닥을 치우고 가시는 미화원 선생님에 의해 모두가 함께 기상하죠. 7시경부터 시작하는 이른 아침 식사와 투약, 그리고 아침 주치의의 회진을 기다리며 환자들은 대기 모드로 들어가죠. 저녁엔 더 일찍 마감돼요. 저녁 6시경 먹는 밥과 다 같이 동시에 먹는 저녁 투약이 끝나면 빠르면 8시, 늦으면 9시엔 잠이 들게 되어 있죠. 물론 밤새 아프신 분들, 검사하시는 분들로 인해 잠을 뒤척이게 될 때도 많지만, 다인실 커튼 안에서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 모른 채 하루가, 이틀이, 그렇게 2주가 순식간에 지나가죠.

    혼자 입퇴원이 익숙해질 무렵, 어느 분께서 저의 침대로 오셔서 이야기하셨어요.

    “가족이 없어?”

    “아니에요. 언니랑 동생이 주말에 왔었어요.”

    “아니, 부모가 없어?”

    “아, 아니에요. 부모님 걱정하실까 봐 이야기를 못 했어요.”

    “그러는 거 아니야. 자식이 아플 땐 부모가 같이 아파야 하는 몫이 있어. 엄마에게 빨리 전화해서 아프다고 이야기해. 그럼 더 빨리 나을 거야. 젊은 사람이 참 혼자 안됐네.”

    그렇게 병원을 가거나, 혼자 앰뷸런스를 타면서 “혼자세요? 혼자 사세요? 위험한데…” 같은 말은 들어봤어도, [부모의 몫]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였어요. 매번 씩씩한 척했던 제가 ‘나 혼자 아파내고 있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왈칵 쏟아지게 한 말이었죠.

    그 후로 어땠냐고요? 물론 한동안 부모님께 계속 말하진 못했어요. 내가 왜 아픈지, 내가 왜 입원해야 하는지조차 뚜렷하지 않던 시절이어서 그랬을까요. 여전히 어린 마음에 부모님께 걱정을 덜 전하고 싶어서였는지, 그게 아니면 혼자 씩씩하고 센 척하기 위해서였는지, 지금도 그때의 감정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로부터 멀지 않은 미래, 제 전신의 혈관이 모두 일을 멈추고 심각한 수술대 앞으로 향하기 직전, 저는 엄마에게 알렸어요.

    “엄마, 같이 있어줄 수 있어?”

    엄마는 한달음에 달려오셨고, 제가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음식들을 챙기시며 밤새 통증으로 잠들지 못하는 저를 곁에서 지키셨죠.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병원 투어와 시술, 수술들을 엄마 손을 잡고 함께했죠. 엄마는 지금도 그때를 떠올리면 제가 사라질까 너무 두려웠다고 이야기하세요. 아마도 저보다 더 간절했던 엄마의 기도와 보살핌으로 제가 건강을 많이 회복하고,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거라 생각해요.

    선글라스를 끼고 캐리어를 끌며 혼자 입퇴원을 하던 30대의 저는 사라졌어요. [부모의 몫]은 부모가 아파해야 하는 몫이 아니라, 자식이 부모의 그늘 아래에서 다시 보호받아야 하는 몫이었구나, 하는 뒤늦은 깨달음과 함께.

    엄마를 부를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죠? 이젠 제가, 엄마가 부르면 달려갈 수 있는 딸이 되어야겠죠. 하지만 엄마도 과연 자식에게 아프다고 연락을 하실까요?

    “딸, 아픈데 와 줄 수 있어?” 그런일은 더더욱 쉽지 않겠네요.

  • [30대] 의사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30대] 의사선생님, 이것 좀 봐주세요.

    공황장애 약을 투약하기 시작하던 시기부터였을까? 30대 중반부터 후반으로 치닫는 최고의 통증 복합 시기에 정말이지 솔직히 의사선생님에게 말하지 못한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어요.

    분명 눈을 감았는데 눈앞에 너무 다양한 사람 얼굴 같은 형상이 보이고,

    분명 귀를 막았는데 내 몸속에 흘러다니는 피의 소리까지 다 들리는 듯했고,

    분명 통증을 완화하는 약을 먹었는데 머리 속 망치를 두들기는 순간의 통증을 느끼곤 했죠.

    이런 말을 하면 신경정신과의 진단명이 늘어날까 두려워 솔직하게 말하지 못했어요.

    몸은 한시도 같은 자세로 앉기도, 눕기도, 서기도 어려울 정도로 갖은 통증이 달라붙어버린 상황이 되었어요. 디스크, 족저근막염, 섬유근육통이라 불리는 물리적 통증을 유발하는 병명부터 CPS까지, 내 몸의 모든 통증을 느끼는 모든 감각이 다 깨어 있던 시기였어요.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진단명 앞에 매우 스키니해서 지방과 근육이 극히 부족했던 신체 조건은 망각하고, 쌓여가는 진단명과 약물을 기반으로 통증을 이겨보려 했던, 통증이 없던 시절이 기억조차 나지 않던 일상이 가장 힘든 시기였죠. 시간이 지나 온몸의 정맥들까지 통증의 신호를 보내며, 다발성 정맥 손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의 통증은, 여전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그 어떠한 통증보다 가장 강하고 순간적이며 잠들 수 없는 통증이었다고 기록할 수 있어요. 어느 누구도 어떠한 통증이 어떠한 증상이라고 제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어요.

    제가 이곳저곳, 여기저기 너무 다채롭게 통증을 느끼는 단계에 이르자 받았던 CPS – Central Pain Syndrome (중추성 통증 증후군(Central Pain Syndrome)은 뇌, 뇌간, 척수 등 중추신경계의 손상이나 질병, 장애로 인해 발생하는 신경병성 통증 https://en.wikipedia.org/wiki/Central_pain_syndrome 발췌)을 진단받고 한동안 관련 약물을 통해 다발성 통증을 막아보려 했었어요. 하지만 그 약마저 혈관통은 뚫어내는 것을 경험하면서 CPS가 아닌 다른 증상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과정이었어요.

    환자로서 의사분께 설명하기 참 어려웠어요.

    매주 증상은 바뀌고, 그렇게 몇 년 동안 증상이 변화하면서 쌓이다 보니 내가 느끼는 통증을 정확히 전달하고 있는지조차 스스로 의문이었어요. 아마 공황장애 때부터 통증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내가 설명하기 어려운, 약물을 먹은 후의 반응, 그리고 내 몸 부위의 통증 등을 노트에 기록하며 병원을 방문할 때 보여드리곤 했어요. 이 방법은 10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대학병원의 짧은 의사와의 인터뷰를 위해서 준비하는 저만의 기록법이긴 해요.

    통증의 변화하는 부위, 약물을 먹고 반응이 나타나거나(두드러기, 두통 등), 증상이 나타난 후 DAILY 변화 등을 저는 저의 노트에 틈틈이 기록하여 의사선생님을 만나는 단 몇 분 안에 설명을 하곤 해요. 몸이 가장 극도로 예민하거나 지속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짧은 의사와의 만남에서 내가 겪는 고통이나 불편함을 정확히 설명하긴 참 어렵죠.

    저는 의료진을 신뢰하고, 의료진을 만날 때 최대한 내가 겪은 상황을 정확히 설명하려고 노력해요. 아이러니하게도 질병은 개인마다 증상도 상이하고, 질병을 치유해나가는 방법도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어요.

    좋은 의료진을 만나 나의 질병을 잘 설명하고, 신뢰를 기반으로 치료를 통해 나아가는 과정에는 ‘과연 내가 어떠한 상황인가’를 잘 설명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질병도 겪을수록 는다고, 저도 처음엔 그러지 못했어요. 디스크 수술을 하고 재활을 못 하고 병원을 전전할 때는 병원을 불신하기 급급했죠. 노력 없는 나의 식습관과 재활 운동에 대한 반성, 그리고 정확한 증상의 설명은 모두 누락한 채, 의사에게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곤 했죠.

    ‘누가 이랬더니 좋아졌다더라’라는 일명 썰은 저는 믿지 않아요.

    ‘이거도 한번 해봐, 저기도 한번 가봐’라는 주변의 추천도 저는 잘 듣지 않았어요. 그러기엔 너무 많은 질병이 있었고, 그 질병이 주는 복합적 통증은 저 말고는 아무도 느끼지 못했으니 더더욱 그랬죠.

    대신 질병을 겪으면서 나 스스로 노력해보고, 기록해보고, 도전해보고, 나에게 맞는 것과 맞지 않는 것을 의료진과 최대한 많이 나누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틈틈이 다양한 의료진들이 쓴 책을 통해 조금 더 이해하려 노력할 뿐이죠.

    img) 2025.12.15~25일까지 급성 괴사성혈관염 기록일지. 응급실과 3개의 진료과를 위한 기록
    의료진을 만나면, 짧은 시간안에 증상과 다른 병원에서의 치료과정을 같이 공유하는 도구가 되었죠.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는 결국 나 자신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어요. 자신의 몸이 보내는 신호를 한번 잘 따라가 보세요. 그리고 만약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다면, 기록해보세요. 언젠가 그 기록이, 당신의 몸이 많은 신호를 주었다는 증거로 도움이 될 거예요. 단, 너무 예민해지진 말기. 이 부분이 저는 가장 어려웠어요. 허나 신기하게도 통증과 투약정보 그리고 투병의 과정을 기록하면서 내 스스로 몸을 깨닫고 아픈 나를 인정하게 돌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저보다 더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병과 슬기롭게 싸워가고 있는 모든 분들을 응원하며.

  • [40대] 60살에 저는 건강 평균은 될 수 있겠죠?

    [40대] 60살에 저는 건강 평균은 될 수 있겠죠?

    40에 다시 시작하는 몸, 다시 시작하는 식사

    30대 중반에 시작한 질환 판정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 정말 많은 시간이 걸렸어요. 온몸은 원인을 알 수 없는 다양한 통증으로 가득했고, 단 하루라도 몸이 편했던 느낌이 무엇인지 점점 흐릿해져 갔어요.

    점점 통증 없는 평범한 일상으로부터 나는 멀어지고 있었죠.

    30대 말, 원인 미상의 다발성 정맥 손상으로 인해 제 몸에는 150회가 넘는 주사바늘이 온몸에 꽂혔어요.크고 작은 시술과 수술을 통해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 정맥들을 하나씩 없애는 과정을 몇 달에 걸쳐 진행했어요. 단순한 하지정맥 문제가 아니었어요.

    몸 전신의 정맥들이 피를 심장 방향으로 되돌리는 기능을 서서히 멈추고 있었거든요.

    그 시절을 이야기하면 주변에서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이 있어요.

    “어떻게 좌절하지 않으셨어요?”

    6개월 사이 체중은 7kg 이상 빠르게 빠졌고, 상시적인 브레인 포그, 심각한 소화장애, 난생처음 겪는 혈관 통증으로 매일 밤이 악몽 같았어요. 수면제도, 진통제도 잠재울 수 없는 끔찍하고 돌발적인 통증들이 온몸 곳곳에서 자주 나타나곤 했죠.

    그럼에도 좌절을 하거나 무언가를 탓하기엔, 저는 원인을 알 수가 없었어요.

    6개월 동안 3곳의 대학병원, 7개의 진료과를 방문하며 다양한 검사를 받았지만 끝내 원인을 찾지 못했어요. 결국 ‘원인 미상’이라는 질환 코드가 붙었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저는 너무 괴로웠어요.

    ‘번개가 몸에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

    싶을 만큼, 매일 이해할 수 없는 통증에 시달려야 했어요. 그 과정에서 좌절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할까요? 저는 좌절보다 “왜, 대체 왜”가 더 궁금했어요. 원인만 찾으면 이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놓을 수가 없었거든요.

    끝까지 원인 미상으로 남았지만, 돌이켜보면 오랜 영양 부족과 어릴 때부터 복용해온 약물들, 그리고 저의 잘못된 생활습관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가 아니었을까 싶어요.

    아이러니하게도, 병원은 저에게 위로의 공간이기도 했어요.

    진단 코드가 하나씩 늘어나면서도 ‘그래도 이 정도여서 다행이다’ 싶은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이 병원이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제가 겪는 통증들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수는 없었어요. 다만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낫기만 바랐던 무지한 환자였던 건 사실이에요.

    그 고통의 시간을 수술로 통과하면서, 오히려 저는 희망을 얻었어요!

    메디쏠라의 김형미소장님(당시 S병원 영양팀장)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셨거든요.

    “지금부터 5년만 새롭게 다시 시작한다고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해봅시다. 지금 오메가3 섭취가 정말 중요하지만, 갑자기 너무 많이 드시는 건 오히려 무리예요. 영양이 너무 손실된 몸에 갑자기 과다한 영양이 들어가면 부담이 될 수 있어요. 드시는 양은 최대한 유지하되, 자주 드시고 단백질 섭취는 꼭 빠트리지 마세요. 지금부터 5년이면 기능을 잃은 혈관들을 대신해서 많은 부분이 회복될 거예요. 40대에 시작하는 5년이지, 20대였다면 훨씬 빨랐을 텐데…”

    농담으로 마무리하셨지만, 소장님의 말은 저에겐 정말 반짝이는 등대 같았어요.

    ‘아, 나에게도 희망이 있구나. 지금부터라도 규칙적으로 영양의 균형을 맞춰 먹기 시작하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내 몸은 충분히 회복할 수 있구나!’

    그리고 한 가지 더 큰 목표를 세웠어요.

    38년간의 대학병원 생활을 마치고 메디쏠라에 합류해 주신, 정말 대단한 에너지의 소유자 소장님을 보면서요.

    ‘그래, 지금부터 노력해서 60살에는 소장님만큼은 못되어도, 그 나이 평균 정도의 건강을 회복해야겠다!’

    30대에 70대의 몸 상태를 진단받았던 제가, 40대가 되면서 오히려 60살에는 또래보다 더 건강해질 거라는 20년 장기 계획을 세운 거예요.

    사진 – 수술 5년 후, 맨발등산에 푹 빠졌죠.


    7년이 지난 지금, 저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사이 가장 큰 변화는 메디쏠라가 탄생했다는 점이에요.

    수술 이후 재활로 시작했던 걷기는, 이제 거의 매일 5~7km를 걷는 루틴으로 자리 잡았어요. 오랫동안 망가진 식습관도 모두 내려놓고 저는 철저히 소장님께서 알려주신 꼭 필요한 영양의 원리와, 필수지방산을 위주로 저에게 맞는 식사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리고, 통증이 없던 시절의 몸 컨디션을 이제는 상상할 수 있어요.

    아마도 60세에는, 또래 중 가장 건강한 제가 되어 있지 않을까요?

  • [30대] 한국사람인데, 고춧가루 알레르기???

    [30대] 한국사람인데, 고춧가루 알레르기???

    먹는다는 두려움을 깨야만 한다.

    30대 중후반, 몸은 예민함을 넘어서 모든 음식과 약물을 거부하는 단계에 이르렀어요.

    거의 매일 항히스타민을 먹거나 스테로이드를 섭취해야 할 정도로, 입 속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게 두려울 정도였죠.

    허리디스크 수술을 한 30대 초반 이후, 공황장애부터 자율신경계 이상, 장 누수까지 매우 빠르게 다양한 민감 증상들이 연달아 나타나기 시작했어요.

    그 중 가장 괴로웠던 건 바로 먹는 행위였어요.

    어릴 적부터 알레르기가 많았던 몸이라, 웬만한 알레르겐은 피해서 살 수 있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3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그 모든 패턴에서 공식이라는 게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특히 환경적 알레르겐이 아닌, 음식이나 약물을 통한 반응들은 정말이지 적응하기 너무 힘든 증상들이었죠. 병원의 대다수의 처방약에서도, CT 조영제에서도, 심지어 지나가는 흡연자의 담배 냄새만으로도 제 몸은 매우 과민하게 반응하며 대놓고 티내기 시작했죠. 마(蒣)와 같은 특정 알레르겐에선 귓속과 기도가 막히는 아나필락시스 증상도 여러 차례 겪으면서, 입 속에 무언가를 넣는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스스로 매우 조심스럽게 학습된 두려움과 같은 패턴이 되었죠.

    처음 이유식을 하던 어린 시절에는 매일 고등어구이만 먹었다고 해요. 그러다 10대 초반쯤, 고등어 알레르기가 생기면서 더 이상 고등어는 못 먹게 되었죠. 토마토도 그랬어요.

    어릴 적엔 토마토를 먹으면 입 주변이 가렵고 괴로웠죠. 복숭아는 털에만 알레르기 반응을 해서, 엄마가 작게 썰어 주시면 먹는 데 문제는 없었어요.

    어릴 적 엄마의 보호 아래 알레르겐을 거르는 건 훨씬 수월했어요.

    엄마는 알레르기가 심했던 저를 위해 유기농 채소나 농약을 쓰지 않은 재료들을 따로구해 요리하실 정도로 많은 신경을 써줬죠. 실제로 라면 같은 인스턴트 음식도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한두 번 먹을 정도로, 모든 음식에 정성을 쏟아 주셨어요.

    20살이 넘어 처음 간 일본 여행에서는, 소바(메밀)를 먹고 기도가 막히는 아나필락시스 반응이 와서 신주쿠 오피스가에 있는 응급실에 간 기억도 있어요. 그 후로 오랫동안 소바가 원인인 줄 알고 메밀을 피했는데, 15년이 훌쩍 지나서야 그때의 원인이 메밀이 아닌 소바 속에 들어있던 마(蒣)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죠.

    물론 그 사실을 알게 된 것도, 마 가루가 들어간 율무차를 마신 후 같은 반응으로 응급실을 다녀온 이후였어요. 자연스럽게 그 후로는 끈적끈적한(뮤신) 식물성 식품은 피하게 되었고, 오크라를 통해 다시 한 번 알레르기 반응이 나왔을 때 확신하게 되었죠.

    사실 혈액검사로 확인할 수 있는 알레르겐은 매우 한정적이에요. 그래서 살아가면서 직접 경험을 통해 나에게 맞지 않는 유형이나 비슷한 성질의 식품들을 스스로 찾아가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죠. 제가 성장하던 시기는 더더욱 정보가 제한적이었죠. 저는 스스로 실험 하는게 가장 빠른 방법이지만, 실험에 소극적이었던거죠.

    30대 중후반으로 돌아가면, 그때 제 얼굴은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정도로 붉고, 고름이 흐르는 상태였어요. 코로나 이전인데도 항상 마스크를 쓰고 생활했어요. 병원에서는 혈관염으로 진단하고 심할 땐 항생제를 종종 복용하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오랜 영양 실조와 그리고 잦은 스테로이드 복용으로 인해 세포 조직들이 얼마나 약해져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어요.

    나이가 들며 섭취가 점점 제한될수록, 영양을 고려하지 못한 채 그저 반응이 없는 음식만 먹다 보니 몸은 점점 더 염증과 영양 불균형의 끝으로 치닫게 되었어요. 30대 후반에 서울에서 그것도 식품회사를 다니는 여성이 너무 심각한 영양실조 상태라니! 의사들도 모두 놀라워했어요. 다양한 음식의 천국 대한민국에서?!!!

    사진 : 2025년 12월 31일 가족의 식탁. 이젠 거의 다 먹을 수 있는 음식들

    먹는 즐거움, 함께 음식을 나누는 즐거움보다는, 자극이 오지 않는 음식, 반응이 없는 음식만을 찾다 보니 영양 불균형과 영양 실조 상태가 더 오래 지속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혈관염은 더 심해졌고, 채소, 밥, 김, 흰살생선 이외의 음식들과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죠. 첨가물을 배제하고 채식과 자연식 위주의 식사를 했지만 건강은 나아지지 않았고, 증상은 오히려 악화되었어요. 영양이 모두 무너진 상태에서는, 필요한 영양소 없이 제한적인 섭취만으로는 어떠한 변화도 이끌어낼 수 없었던 거죠. 부족한 영양소는 링겔로 채웠지만 효과가 지속되진 못했어요. 그 시기부터 설탕은 최대한 배제한 식사를 유지하고 있어요. 혈관염에 가장 빠르고 강하게 반응했던 것이 단 음식, 특히 백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입에 들어가는 순간 혈관을 통해 염증 반응이 즉시 나타났죠.

    다시 떠올려도, 그 시절엔 음식에 대한 즐거움이란 논할 수 없었고, 그저 반응하지 않는 음식을 먹을 뿐이었어요. 그러던 중, 지금의 메디쏠라 김형미 소장님을 만났어요. 소장님은 제가 다니던 대학병원의 임상영양팀장이셨죠. 오랜 영양 실조와 혈관염 증상으로 소장님을 만나 식단 점검과 가이드를 받게 되었어요. 소장님도 저의 상태를 심각해하시며 식단 일기를 써보라고 권유해 주셨죠.

    소장님께 메시지를 드리면서, 저는 조금씩 더 먹고 더 다양하게 먹으려 노력하게 되었어요.

    그 과정에서 소장님은 제 민감한 반응 중 하나가 고춧가루(고추장, 김치 등)가 들어간 음식이라는 것을 발견하셨고, 한동안 고춧가루도 멀리한 시절이 있었어요. 지금 돌아보면 몸이 너무 예민해진 나머지, 고춧가루의 자극조차 버티지 못했던 상황이었는데 마치 고춧가루가 알레르겐인 것처럼 해석했던 거죠.

    *알레르겐 — 일반적인 사람에게는 무해하지만, 특정 사람의 면역계가 과민하게 반응하여 알레르기 증상(재채기, 두드러기, 호흡 곤란 등)을 일으키는 원인 물질 — 과, 영양이 모두 무너진 몸에서는 기초부터 다시 쌓아야 하는 상황 조차 혼돈이 있었죠.

    알레르기를 피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말 그대로 알레르겐을 피하는 것이에요.

    하지만 피하는 식습관 속에서 성장하다 보니 성인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양 불균형으로 이어졌고, 저는 결국 먹지 않는 것이 가장 편한 상태에까지 이르고 말았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참 단순한 원리인데, 이 원리를 깨닫고 몸이 변화하는 데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는게 지금 돌이켜보면 가장 아쉬운 시간이에요.

    요즘은 먹고 싶다는 욕구를 온전히 꺼내려 하고, 함께 먹는 즐거움도 더 찾으려 노력해요.

    그리고 내 몸의 균형을 생각하는 영양 섭취의 관점으로 완전히 바뀌었죠.

    여전히 피하지 못하는 알레르겐이 저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이제는 함께 먹는 즐거움을 알고, 여행지에서 낯선 음식에 도전하고 싶은 용기도 생겼어요.

    그리고 우리의 몸은 영양이 균형을 이룰 때 건강이 지속된다는 것을, 저는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어요.

    하루에 두~세 번, 자신을 위한 [먹는 선택의 시간]

    오늘, 무엇을 위해 드시겠어요?

  • [20대] 공간을 설계하면서 몸을 설계하는 건 잊었어요.

    공간을 짓다. 몸은 무너지다.

    10대 때 의사 선생님이 엄마와 제게 말했어요.

    “아무래도 따님은 대학에 가거나 사회생활을 하기는 무리일 거예요.”

    이 말이 아마도 제 20대를 더욱 삐딱하게 살아가게 한 씨앗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의 따뜻한 밥과 보살핌을 받던 10대 시절이 끝나고, 저는 말 그대로 폭주기관차 같았어요. 어릴 때부터 심각하던 알레르기와 아토피는 이제 한계에 도달해, 눈 주변에서 고름이 흐르기 일쑤였죠.

    건축과에 들어간 이후, 매일 밤샘 작업과 잦은 술자리, 그리고 다양한 재료들을 다루면서 내 몸의 면역 따위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사실 그보다는 건축이 더 좋았어요. 밤새 얼굴이 따갑거나 몸이 가려운 것보다 건축에 몰입하는 게 더 좋았으니까요. 금속에도, 종이 가루에도, 먼지나 진드기, 심지어 나무 가루만 닿아도 피부는 불타듯 빨개지고 부어올랐지만, 그래도 밤새 스튜디오에서 모형을 만들며 보내는 시간이 더욱 값진 시간이었어요.

    그때부터 시작이었던 것 같아요. 10대 시절 받은 경고를 무시한 채 폭주기관차가 되어 달리기 시작했죠. 잠은 기본으로 4시간 이상 잔 적이 없고, 술은 거의 매일 마셨어요. 그뿐이었을까요? 가장 큰 문제는 잘 먹지 않았다는 거예요. 초콜릿 하나와 김밥 한 줄이면 하루를 거뜬히 버틸 만큼 음식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냐고요? 너무 뻔한 이야기지만, 저는 대형 설계사무소에 들어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쓰러지고 말았어요. 지나고 보면 그때 몸이 첫 번째이자 가장 큰 신호를 보냈는데, 그저 잠을 자지 않아서 그렇다고 가볍게 넘겨버렸던 것 같아요.

    20대 중반에도 의사 선생님이 말했어요. “대체 뭘 해주길 바라죠? 몸이 제 기능을 하는 상태가 아닌데요.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철없던 저는 “호주에 다시 가고 싶어요”라고 했고, 그 길로 유배 아닌 휴식을 취하러 20대의 1년을 멈추게 되었죠.

    지금 돌이켜 보면, 몸은 정직하게 신호를 보내줬는데 저는 호주에서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도 그 신호를 또 잊어버리고, 결국 30대 중반까지 수많은 질환을 얻게 되었어요.

    건축을 하던 시절, 저는 공간을 만드는 데 너무 정신이 팔려 먹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자는 것도 잊었어요. 1년을 쉬고 나서도 똑같이, 아니 그전보다 더 열정적으로 매달려 먹지도 않고 술은 더 마시고, 잠은 여전히 최소한으로 줄인 채 밤샘을 즐겼어요.

    건축이란 정교한 기초 위에 잘 짜인 설비, 구조 등 모든 시스템이 딱 맞아떨어질 때 좋은 공간이 완성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저는 제 몸을 설계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어요. 부모님이 좋은 기초를 주셨는데, 저는 점점 스스로 그 기초를 무너뜨리기 시작했죠.

    img : GPT 건축물과 몸은 참 비슷해요. 복잡 다다하고 돌봐야만한다는 사실!

    아무리 좋은 건물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고 먼지를 닦아내지 않으면 쉽게 망가지기 마련이에요. 우리 몸도 건축물과 참 닮았어요. 좋은 유전자를 받고 부모님의 보살핌 아래 기초가 튼튼하더라도, 돌보지 않으면 방치된 건물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건축하던 당시에는 전혀 몰랐어요.

    여러분의 몸은 어떤가요? 혹시 방치하고 있지는 않으신가요?

    저는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던 제 몸을 돌보고 이해하는 데 지난 몇 년을 보냈어요. 감사하게도 다시 돌보기 시작하니, 방치된 방을 정리하듯 제 몸도 조금씩 변화가 일어나고 있어요. 물론 이해하는 데도, 그 변화를 느끼는 데도 무척 많은 시간이 걸려요. 하지만 분명한 건, 이해하려 하고 보살피려 한다면 반드시 변화가 온다는 거예요.

    신기하게도 몸도 공간과 마찬가지로,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라는 사실!


    *깨진유리창의 법칙이란?

    1982년 3월 범죄학자 제임스 Q. 윌슨과 조지 L. 켈. 링은’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 깨진 유리창 하나를 방치해 두면, 그 지점을 중심으로 범죄가 확산되기 시작한다는 이론으로, 사소한 무질서를 방치하면 큰 문제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출처: 위키피디아

  • [Porlog] 종합병원이라 불리던 아이

    [Porlog] 종합병원이라 불리던 아이

    인생을 바꾸는 결심, 여러분은 몇 번 해보셨나요?

    여러분은 인생이 바뀌는 결심을 하는 특별한 경험을 몇 번 해 보셨나요? 그 특별한 결심을 매번 같은 장소에서 하게 된다면, 그 장소는 여러분에게 어떠한 의미로 살아가게 될까요?

    저에겐 바르셀로나, 스페인이 그런 장소입니다.

    사진 : 2018년 9월 바로셀로나, 이 때 메디쏠라를 결심했죠.

    멀리 떠나와 나의 일상에서 분리되는 순간, 그런 경험들은 더욱 다양해지겠지만 나의 경험은 매우 특별합니다. 지금부터 저는 여러분들께 제가 왜 메디쏠라를 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게 제 삶에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드리려고 해요.

    사실, 저는 어릴 적부터 다양한 불편함과 통증들을 동반하고 살아가고 있어요. 어릴 적부터 친구들은 저를 종합병원이라고 불렀어요.

    의사 선생님들은 10대의 나에게 사회생활을 하긴 어려울 거라고 이야기했어요. 20대의 저는 일하다 쓰러져 1년 넘게 쉬어야만 했어요. 30대의 저는 알 수 없는 원인미상의 온갖 질병 코드를 수집하는 단계에 이르더니 두 번의 큰 수술을 받아야만 했어요.

    그리고 나이가 들어가는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요? 저는 지금이 가장 좋아요. 통증이나 증상이 사라진건 아니지만, 저는 매우 밸런스 있는 길을 찾아가고 있어요.

    일을 매우 좋아하는 저는, 매일 어떻게 일하고, 먹고, 쉬고, 어떻게 운동을 해야 하는지조차 찾아가는 데 너무 어렵고 이해하는 데 오래 걸렸죠. 많이도 헤맸죠. 항상 증상은 달라졌고, 매번 그 이전의 방법이 통하지 않았어요. 저는 40대 중반이 지난 이제서야 조금 제 자신에 대해, 제가 겪는 많은 통증과 일상의 불편함을 달래고 사는 방법을 알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왜 내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반성하고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지를 이해하게 되었죠. 물론 이 모든 과정을 스스로 이해하게 된 건 아니에요. 너무 오랫동안 저는 제가 왜 이런지 그저 궁금했어요. 이해할 수 없었죠.

    제 주변엔 훌륭한 의료진들과 오랫동안 잘못된 식습관을 알려 주시는 임상영양 전문가, 통증에 시달리는 몸을 이해하게 해주신 도수치료 선생님과 필라테스 전문가, 그리고 항상 저의 밥 걱정을 하시는 엄마까지. 많은 전문가분들의 도움으로 이제서야 일상의 균형을 찾는 데까지 이른 것 같아요.

    그게 바르셀로나랑 무슨 관련인지 궁금하시죠?

    신기하게도, 항상 통증이 심해지고 삶이 이해되지 않을 즈음, 저는 바르셀로나에 방문할 기회가 있었어요. 20대부터 40대 중반인 지금까지 5번의 바르셀로나는 저에겐 항상 순간의 건강을 되돌려주는 기적의 장소였어요.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인생의 두번이나 터닝을 만든 결심을 한 장소이기도 하고, 그 결심 중한번이 메디쏠라를 탄생시키기도 하죠.

    2026년 5월, 저는 또다시 스페인 출장길의 비행기에서 이 글을 적고 있어요. 제가 느끼고 경험한, 그리고 현재도 진행 중인 일, 통증, 그리고 삶의 밸런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릴게요. 누군가에겐 공감과 정보를, 그리고 그 무엇보다 제 글을 통해 일상에 작은 용기와 위로가 되시길 바라며, 진솔하게 적어볼게요.

    제 글은 저의 100% 경험을 바탕으로 적는 글이며, 저는 의료진이 아닌 점을 이해해 주세요.


    seaon •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아름다워 20살에 지은 제 닉네임이에요.

    [Seaon’s Health Profile]

    0세 ~. 현재 진행중 : 알러지, 아토피 , 알레르기성 결막염 등 권위자 (집먼지,진드기, 모든 동물, 음식, 약물 등) 아나필락시스 다수

    10대 : 중이염(완치) , 긴장성 만성변비(진행중) 간 면역 (종료)

    20대 – 아나필락시스 시작 , 알레르젠 치료 (실패)

    30대 – 섬유근육통, 허리디스크수술, 자율신경계실조증, 장누수증후군, 극심한영양실조, 공항장애, 원인미상의 다발성정맥손상(수술)

    40대 – 괴사성혈관염, 뇌동맥류, 갱년기


    [Seaon’s profile]

    MEDI.SOLA (Founder) CEO 공동대표 2023 ~

    JOHNCOOKDELIMEATS / SFOOD (CMO, COO) 2013~2023

    ARCHITECTURAL DESIGNER 2005~2012

    M.A (Master of Architect) 2005